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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좋은 일을 오래......

-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를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 지는 것이 있다면 내게는 책 읽기다.

'더'라는 것은 읽을 때마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는 것인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마주하는 진실에 가깝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딘 책을 만날 때

문장을 읽고 있지만 그 문장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을 때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다.


- 나무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있는가. 메트로폴리스일수록 그곳엔 나무와 숲이 흥성하다. 나무도 숲도 없는 도시는 디스토피아를 예고한다. 마찬가지로 책이 없는 인생은 설정 불가능하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을 가고, 연애를 하고 직업을 구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 모든 과정에는 책이 있다. 아무리 디지털과 영상이 판치는 시대라 해도 책은 역시 책이다! 책을 대체할 만한 지혜의 전령사는 없다.
문제는 우리 시대는 책이 품고 있는 이 원리와 이치를 망각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책이 그저 정보와 지식의 그릇이라고만 여긴다. 그 정보와 지식을 빼내면 마치 껍데기만 남는 것처럼. 그래서 책을 읽는 이도, 읽지 않는 이도 다 불행하다. 그 안에 온 우주가 출렁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책이 점점 사라질까 봐 두려워한다. 책이 없으면 삶이 더 황폐해질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되새겨야 할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 몇 권을 읽느냐'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아니다. 책이 본디 무엇이든 지, 책과 문명, 책과 인생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깊이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되니라. 인생이라는 길 위해서 책과의 만남보다 더 신성한 순간은 없다는 것을.
- <안다는 것-읽고 쓴 다는 것> 중에서, p57



매일 '읽는' 일을 주업(생업)으로 할 수 있다면,

'쓰는' 일이 내 밥 법우가 될 수 있다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바라는 것도 책을 읽는 순간 더 크게 다가온다.


큰 아이가 요즘 종종 시청하는 유튜브 중 '흔한 남매'라는 콘텐츠가 있는데,

아이가 시청할 때 옆에서 힐끗거리다 보면 어른인 내가 봐도 은근히 재미있다.

에피소드 중에 '슬라임이 학교 공부라면' '게임이 학교 공부라면' 같은 상황을 담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슬라임을 좋아하는 에이미가 수업 시간 선생님 몰래 슬라임을 만지다 들켜서 혼이 나고,

화면이 바뀌면서 상황극이 시작된다.

수업 시간에 슬라임을 배운다. '슬라임 만드는 게 공부라고?' 에이미는 놀라면서도 신나 한다.

자신 있게 시작하지만 공부가 된 슬라임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잘 못 만든다고 혼이 나고, 집에서도 엄마가 '아니 슬라임 공부를 더 해야겠어!'라며 종용한다.



재미로 하던 일이 '공부'가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상황들을 유쾌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걸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읽는 일이, 쓰는 일이' 내가 해야 하는 주된 일이 된다면 어떨까?

그때도 이렇게 자발적으로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게 읽고 쓰는 일들이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는 건 아닐까.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는 20년이 넘게 읽고, 쓰는 것으로 밥법 이를 하고 있다는 저자의 글쓰기 특강이다.

읽는 일과 쓰는 일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저자의 글은 '이론'과 '실전' 편으로 나뉜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전 읽기가 왜 중요한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이론적 이야기를 들려준 뒤 수유너머, 감이당 등을 통해 글쓰기를 가르치고, 학인들의 글을 읽어 온 저자가 전하는 실전 글쓰기 특강이 이어진다.


강의실에 앉아서, 저자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었다면 더 좋았겠구나 싶은 글들이었다.

글을 쓰고, 읽는 일을 통해 배우고 나누는 사람들 틈에 앉아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혼자 읽고, 혼자 쓰는 내게

여럿이 모여 함께 읽고 함께 쓰고 그것을 나누면서 배우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잘 몰라서 궁금하고, 늘 희망한다.

어쩌면 내가 자꾸 독서모임에 대한 글을 찾아 읽고, 블로그를 찾아 기웃거리고, 강의 프로그램을 검색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읽지?

나는 왜 쓰지?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읽었고, 썼다.

언젠간 정말 내가 쓰는 일을 업으로 가지고 살 줄 알았던 의욕 넘치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는 읽음을 통해 자존감을 세우고, 기적 같은 변화를 경험하고, 쓰는 일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타인과의 관계가 변화했다고 했다. 돈을 벌게 되었고,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들이 모두 사실일 거라고 생각한다.


'읽고 쓰는 일이 나를 버티게 할 거라'라고 믿는 나 역시 그런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으니까. 끊임없이 배우고 싶고, 알고 싶어 졌으니까 말이다.





<책 속에서>


- 거짓말, 중상, 이간질, 욕지거리, 위선적인 말, 이런 말들이 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는 그런 말들을 금지하는 계율이 존재하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말의 신성함을 복원하는 일이다. 신성함이란 특별하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적당한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가르침을 말하고, 계율을 말하고, 새길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고, 신중하고 이익을 가져오는 말을 때에 맞춰"하는 것이다. 왜? 그런 말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이어 주기 때문이다. 이곳과 저곳, 이 사람과 저 사람, 낯선 것과 익숙한 것, 그 모든 것이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을 할 것인가? 아닌가? 혹은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그전에 말이란 본디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것이었음을, 그 고귀함이란 세상 모두를 연결해 주는 것이었음을 깊이 환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안다는 것- 읽고 쓴 다는 것> 중에서, p51



- 교육의 확장이란 달리 말하면 '책의 해방'이다. 알다시피, 모든 권력의 원천은 담론 혹은 이데올로기다. 구체적으로 삶과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비전이다. 결국은 앎이다. 그러니까 권력을 해체하고 특권층을 타도한다는 것은 이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결국 누구나, 어디서나 배움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 앎의 원천인 책의 해방!

성차별도 그렇다. 21세기는 가히 여성의 시대다. 무슨 소리!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서 아직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데...... 물론 맞다. 하지만 지성의 영역은 바야흐로 여성이 대세다. 모든 공부의 장에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이건 무슨 말인가? 여성이 이제 남성의 정신적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성차별은 불가능하다. 앎을 거부하는 자들이 앎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억압한다는 건 가당치 않다.

요컨데의 해방이 혁명의 궁극적 비전이다. 모든 존재에게 자신을 주도할 수 있는 권리를 허하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에게 책을 허하라! 당연하지 않은가?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은 책을 읽는 데서 시작한다. 존재와 세계를 탐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청년 전태일, 그는 대체 어떻게 그 역사적 위업을 수행했던가? <<근로기준법>>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1987년을 주도한 청년들의 열정과 분노의 원천 역시 책이다. 마르크스를 읽고 레닌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고 <<노동의 새벽>>을 읽고...... 읽고 읽었다. 금서는 더 열심히 읽었다.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역사적 진실이 있다는 증거가 여겨서다. 그들의 청춘을 빛나게 해 준 것들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이념과 정파에 따라 혁명의 전략전술은 다 달랐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지향했던 구호는 단 하나. 누구나! 무엇이든! 다 읽을 수 있는 세상! 그리하여 모두가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 중에서, p78


- 현대인은 참으로 유능하지만 아주 심각하게 무능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휴식이다. 휴식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잘 따져보자. 제대로 쉬려면 일단 노동과 화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의 노동이 힘든 건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소외와 압박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소외고, 억지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압박이다. 그럼 쉰다는 건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함께 보내면 된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설마 그럴 리가?^^ 가족은 감정노동의 현장이다. 감정적인 배설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장, 가족. 20세기 내내 자본과 국가가 그렇게 설정해 버렸다. 어떤 점에선 회사보다 더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한다. 해서 이 배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노동의 스트레스와 감정의 배설, 이 두 가지를 벗어나는 관계 혹은 활동, 그게 뭐냐고? 결국 책이다. 책을 읽는 네트워크에 접속해야 한다. 2008년 이후 제도권 밖에서 인문학 공간이 대폭 열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리라. 물론 직장 동료와 함께할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할 수도 있다. 핵심은 지성을 중심으로 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특히 소리 내어 읽는 낭독 혹은 낭송은 몸을 릴랙스 하는데 최고다.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 중에서, p89


- 우리는 모두 즐거움과 기쁨을 원한다. 한 매체의 모토는 '즐거움엔 끝이 없다'일 정도다. 그런데 늘 허덕인다. 더 많이 원할수록, 더 많이 누릴수록, 그래서 이런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혹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이 아니라 허덕임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린 단디! 속은 것이다. 이 속임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허덕임을 떨쳐 내라. 헐떡이는 것에 도취되는 그 마음과 습관을 벗어던지라. 그러면 그 순간 평온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기쁨이다. 현대 생리학은 그걸 이렇게 증명해 준다. 아드레날린,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 쾌락인데, 그것은 계속 강도를 높여 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끝없는 갈애에 빠지게 된다. 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존재 그 자체로도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고. 바로 그렇다.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온다. <읽는다는 것, 그 거룩함에 대하여> 중에서, p101


-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다. 그럼 어디서 시작하지? 간단하다.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일을 찾아야 한다. 이 말은 또 이렇게 변주될 수 있다.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일. 청년기에도 좋고 중년에도 좋고, 노년에도 좋은 일. 그런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해?'라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를 먼저 물어보자. 좋은 삶을 원하면서 왜 그런 전제를 설정하지 않는가? 늘 꿈을 꾸라고, 꿈은 이루어진다면서 왜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가? 일단 생각을 그 방향으로 돌려 보자. 그러면 차츰 그쪽으로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우주의 원리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길이 열리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쓴다는 것, 그 통쾌함에 대하여> 중에서, p125


- 글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무슨 멘트를 받을까 등등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정작 글 쓰는 데 집중을 못 하는 분들도 있어요. 건 뭐냐면 결국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거죠. 누구나 그런 게 있는데 이게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초기의 증상은 다 그래요. 칭찬받고 싶어요. 힘들게 썼으니까 인정받고 싶고.......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글은 절대 안 늘어요.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한테 집중하세요.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단어 등등. 이게 곧 나의 정신의 지도거든요. 인식이 확장되고 자유를 얻는 게 중요하지, 인정받고 안 받고는 아주 부차적인 문제예요. 남들이 좀 시시하게 평가한다 해도 내가 '와, 이전보다 훨씬 풍부한 사유와 언어들이 생겼어'라고 느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칼럼 쓰기 : 1,800자의 우주> 중에서, p202


- 책을 읽고 글을 쓰라고 하면 '공부를 생업으로 할 생각이 없는데 그걸 왜 읽어요?' 이런 식으로 반문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이게 공부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내가 육체노동을 하든 공무원이 되든 혹은 택배를 하든 공부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존감이 생깁니까?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할 수 있어요. 진실한 태도를 만들어내는 그 힘, 그게 바로 집중력이고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힘과 지혜는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건 일생을 살아가면서 늘 꺼내 쓸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을 확보하는 거예요. <2. 리뷰의 달인 -되기 : 텍스트와의 '활발발'한 케미> 중에서,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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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 저자 고미숙 / 출판 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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