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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을 사야지, 넓고 환한 식탁을

- 이라영 <<정치적인 식탁>>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우리 집엔 식탁이 없다.

이전 집에서 좁은 거실에 식탁까지 있으니 너무 답답해 보여서 비운 뒤

넓은 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굳이 사들이지 않았다.


테이블 하나면 부부와 어린 두 아이가 식사하는데 전혀 부족하지는 않았다.


식탁 없이 산 4년 남짓의 시간 동안 약간의 불편함을 빼면 그냥저냥 살아왔으니 어쩌면 지금도 굳이 식탁이 필요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난밤부터 내내 식탁을 검색하고 있다.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실용적이고, 튼튼하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도 대충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의 원목식탁으로. 너무 종류가 많아 보기만 하면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지만.


식탁은 배고픔을 해소하는 장소이며 타인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언제 밥 한 번 먹어요." 누구나 들어보았을 인사. 또 적어도 한두 번은 누군가에게 이 말을 건넨 적이 있을 것이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를 듣고 아직도 못 먹은 사이도 있다. 처음에는 진짜 먹자는 줄 알았는데, 차차 '그냥 인사'인 줄 알게 되었다.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인연은 참 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와 그 자리를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 식탁을 지배하려는 사람과 밥을 먹는 일은 고역이다. 함께 밥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나눠 먹으며 서로가 연결되는 시간이다.
- 프롤로그 <나의 식탁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중에서, p9




고백하자면 나의 식탁에 대한 바람은 이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인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식탁이,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식탁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넓은 식탁 앞에, 편한 의자에 기대앉아 여유롭게 식사를 하며 나누는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부부가, 아이들이 좀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나누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


가정의 '식탁'에서 시작되는 배움과 교육이 결국엔 사회로 나가가는 최초의 연결고리가 되어 줄 테니까 말이다.


조금 더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어야지 하고 구입했을 때 책이 담고 있을 내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단순하게 '식탁'이라는 말에 끌렸는지도).

저자가 프롤로그에도 적었듯 이 책은 '식탁'이라는 제목이 들어가긴 하지만 맛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누가, 어디에서, 언제 먹었는지에 대해, '먹기'를 둘러싼 인간의 이야기. 결국 사람을 기억하고, 때론 장소를 기억하고, 그로 인해 몸에 쌓인 기억들, 혹은 역사 속에서, 혹은 예술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만난 '먹는' 이야기에 관한 책이다.(같은 책 프롤로그 인용)


책을 읽는 동안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을 이야기하는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통해

짧은 시간 너무 많은 것들을 얻어 낸 것 같은 행복함에 사로잡혔다.


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 속의 이야기들은

'먹는' '말하는' '사랑하는' 입을 통해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권력에 대해,

된장녀, 김치녀로 하대되는 여성에 대해, 여자를 '먹는'다 표현하는 남성주의 시스템에 대해,

소박하지만 가족들에게 먹일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 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 겪어봤음직한 일들, 혹은 전해 들었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해봤을 일들에 대해 떠올리게 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하고, 만들어 내게 한다.


그래서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때로는 분노하면서, 때로는 공감하면서, 때로는 안타까워하면서 읽게 된다.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드나드는 공간이어야 관계의 순환이 원활하다. 어느 한 사람이 부엌이라는 공간에 과하게 머물고 있다면, 식탁에 편히 앉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집안의 관계는 어디에선가 막히기 마련이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동물적 존재에서 말하는 권리를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나아가 타인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 에필로그 <할머니들을 위하여> 중에서, p251



페이지를 다 넘기고,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나는 '식탁을 사야지. 마음에 드는. 넓고 환한 식탁을 사야지' 하고 생각한다.


식탁에 둘러 앉아 허락된 죽음이 제공하는 풍성한 먹거리를 앞에 두고 감사함과, 잊지 말아야 할 일들과, 기념해야 할 일들과, 분노해야 하고, 바꾸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생각한다.


우리에게서 시작된 즐겁고, 유쾌한 식탁에서의 시간들 통해 나의 아이들이 편견 없이 자라길, 존중받으며 살아가길, 베풀며 살 줄 알길, 무엇보다 매 순간 감사하면서 살아가길 바라면서.




<책 속에서>


- 먹는 입, 말하는 입, 섹스하는 입, 이렇게 세 가지 중에서 여성의 입은 주로 한 가지 영역, 즉 섹스하는 입에서 '수동적 쓸모'를 허락받는다. 밥은 동물적 힘이며 말은 정치적, 지적 자유다. 여성의 밥과 여성의 말이 억압당하는 방식은 같은 맥락에 있다. 힘과 자유의 박탈이다. 여성은 먹는 입에도 말하는 입에도 속하지 못한 채, 만드는 손으로서 얼굴 없이 우두커니 있다. '김치녀'라고 조롱하면서 그들의 입에 들어가는 커피를 경멸하고, 입에 들어가는 파스타를 싫어하며, 프랜차이즈 샐러드 바에서 이것저것 집어먹는 그 입들을 혐오하지만, 그 수많은 '김치녀'들이 김치를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러니 여성은 일단 먹는 입의 권리와 말하는 입의 권리가 필요하다. 이것이 '인간 되기'의 정치 활동이다. <감자탕과 김치녀> 중에서, p25


- 여성에게 관심은 없지만 여성을 정의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을 원거리로 보기 때문에 여성이 늘 뭉뚱그려진다. 이 뭉뚱그려져 표현되는 세계는 실재가 되고, 점점 비하되기 좋은 모양새로 빚어진다. 대표적으로 '소녀 취향'이라는 말은 순수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흔히 취향의 유치함을 일컫는다. 순수함에 대한 찬양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미성숙, 감정적, 자기애 과잉이라는 비하로 뒤집힐 수 있다. 미성숙해 보이는 글은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 같은"이라고 표현하며 비하한다. 일기 쓰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도 모르면서. 취향은 계층의 구별만이 아니라 이처럼 젠더화를 통해 성별 구별 짓기의 역할도 한다. 남성은 '여성 취향'이라 불리는 취향을 얕잡아 봄으로써 자신의 성별을 드러내려 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 중에서, p44


- 나는 문득 '아이가 남긴 밥'이 마땅히 '엄마의 입'을 향해야 한다는 편견이 궁금해 이리저리 조사(?)를 해봤다. 한 여성 커뮤니티에는 "애들 남긴 밥 안 먹는 제가 엄마 자격이 없는 건가요? 다들 드세요?"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고, 답변은 제각각이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아이가 남긴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이 엄마에게만 도착하고 있으며, 아이가 남긴 밥을 먹어야 '보통 엄마'라고 규정하는 '문화'가 여성을 검열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남긴 밥을 엄마가 먹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좋았다. 엄마한테 덜 빚진 기분이다. 날마다 내가 쏟아 내는 오물을 처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엄마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마저 내가 뒤섞어놓은 잡탕일 필요는 없고, 내가 남긴 밥을 엄마가 꼭 먹어야 모성을 인증하는 것은 아니니까. 엄마 밥상의 존엄을 빼앗으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엄마가 무슨 잔반 처리기인가. <내가 남긴 밥을 엄마가 먹지 않아 다행이야> 중에서, p48



- 왜 여성보다 남성이 혼자 밥 먹으면 더 우울할까. 혹시 가족들과 식사할 때 아버지-남편들은 '나 홀로 화목'하지는 않았을까. 함께 밥을 먹으면 좋을 때가 많다. 그런데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 모두 만족하려면 그 관계가 '누가 누구에게 수발을 드는' 관계여서는 안 된다. 물! 국 더 줘! 과일! 밥상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주로 이런 말을 할까?

나는 가끔 세상이 전보다는 나아졌다는 착각에 종종 빠진다. 적어도 오늘날의 남성들은 아내가 없으면 엿새 동안 밥을 못 해먹을 정도로 어리석거나, 서로 하녀를 공유하며 살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밥 타령을 한다. 집밥의 가치에 대해 지겹도록 말하다가 이제는 홀로 밥 먹는 남성에 대한 연민으로 어쩔 줄 몰라한다. 혼자 밥 잘해 먹는 남자들도 많은데, 이런 남자들을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라며 밀어내려 한다. <혼자 못 사는 남자들> 중에서, p55


- '고부갈등'이라는 말은 매우 기만적이다. "자기들이 겪어놓고도 며느리에게 똑같이 한다"라며 시어머니 자리에 있는 여성을 비난하는 아들/남편의 목소리가 썩 달갑지 않다. 그런 말로 자신은 아내의 고됨을 이해하는 좋은 남편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은 며느리-시어머니 구도로 문제가 축소, 은폐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진 인물은 주로 시아버지다. 아들은 제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속 끓이며 '등 터지는 새우', 그야말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주인이 노예에게 내리는 포상처럼, 명절 노동 후 '따뜻한 말'이나 선물 등으로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다는 미디어의 조언은 더 어이가 없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은 증상만 드러낼 뿐 그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은 감춘다. 한국의 명절은 휴식도 축제도 아니다. 남아선호 악습과 가부장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이성애 중심주의가 농축된 고약한 이벤트다. 며느리 역할을 하는 여성은 물론이고, 이혼한 사람, 나이 많은 독신, 아이 없는 기혼자, 때로는 아들 없는 기혼자에게 예정된 피로가 규칙적으로 몰려오는 날이다. 이 '전통'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상태로 유지될 이유가 없다.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해> 중에서, p72


- 여성에게 남성이 끊임없이 밥을 강조하는 태도는 정확히 권력의 표현이다. 여성에게서 가장 필요로 하는 두 가지가 밥과 섹스이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대로 "어떻게 아내를 하녀인 동시에 반려자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남자들이 해결하려고 애쓰는 문제들 중 하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환상이 바로 '사랑'이다. 마리아 미즈는 이 구조적 폭력이 어떻게 여성에게 사랑으로 둔갑하는지 정확히 지적한다.


<이 '문명화 과정'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여성은 한 남성을 위한 가정주부이거나 자본가를 위한 임금노동자로, 혹은 둘 다로 훈련되었다. 이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에게 사용된 실제적 폭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내면화했다. 그들은 이를 자진해서 한 것으로, 사랑으로 규정했다. 자기 억압에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였다. 이런 자기 억압을 유지하게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소품을 교회, 국, 가족이 제공했다.> <밥 때문에 죽는 여자들> 중에서, p112


-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위해서는 시간 확보가 필수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민중이 개돼지이기를 바란다. 먹고살기에만 매몰된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개와 돼지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정작 개돼지도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누리고 싶어 한다.

한국인은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이 짧고 노동시간은 길다. 시간당 생산성이 떨어진다. 잘 쉬고 집중해서 일하기보다는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마지못해 일하는 경우가 많으니, 생산성이 떨어지는 상황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식탁에서 식사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삶은 각박해진다. 쫓긴다. 시간병에 시달리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늘 바쁘고, 정신이 없고, 시간이 없다.

노동자는 8시간 이상 노동하면 1시간 이상의 휴식 시간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사용자가 이를 위반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2012년 자살한 삼성 서비스 센터 직은 "배고파 못 살았고"라는 글을 남겼고, 2016년 구의역에서 사고로 사망한 청년은 가방에 컵라면을 남겼다. 각종 공구와 함께 숟가락도 있었다. 말아먹을 밥도 안 보이는데, 한 번 쓰고 버릴 플라스틱 숟가락이 아니라 스테인리스 숟가락이었다. <시간이 고픈 사람들> 중에서, p134


- 먹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팔 수 없는 빵과 케이크를 노숙인을 위한 식사에 제공하는 빵집, 역시 먹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팔 수 없는 과일을 마트 앞에 앉아 있는 노숙인에게 제공하는 마트. 한 사람의 존엄함을 생각한다면 어찌 팔 수 없는 음식을 노숙인에게 주는가라는 생각과, 그들이 배가 고픈데 일단 뭐라도 줄 수 있으면 주는 게 낫다는 의견이 때로 충돌한다.

가난하며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가난해질 의무는 없다. 오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 입을 벌리는 1차원적인 입은 언제나 지배 권력이 원하는 입이었다. 취향 따위는 아예 형성할 수 없는 그런 입, 욕망할 줄 모르는 입, 배고픔에 길들여진 입. 그러나 가난한 입도 욕망할 줄 알고, 기분이라는 게 있다. 2050년에는 세계 인구가 100억 명에 육박할 전망이다. 오늘날에도 음식의 33퍼센트가 버려지지만 굶는 사람은 무려 8억 명에 이른다. 늘어나는 인구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면 이러한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가난한 욕망> 중에서, p139


- 한국에서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자 이 펜스 룰(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하원 의원이던 2002년, 아내가 동석하지 않는 자리에서 다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데서 비롯됨)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바로 남성들이다. 여성과 일대일로 만나 오해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인데, 여자와 일 안 한다는 뜻으로 왜곡시키다. '무고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웃기지도 않은 핑계를 댄다. 그런 식이라면 여성들이야말로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남성들을 배제해야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툭하면'성 대결'하지 말라거나 "모든 남자가 가해자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성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을 왜 환영할까. 여성 상위 시대라고 징징거리지만, 남성들이 실제로 자신의 권력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임을 방증한다. 여성이 성적 대상이 되거나 성 역할에 충실하지 않으면 조직에서 힘께 일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의 과시다. 많은 남성들은 '잠재적 무고 피해자'가 되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성 권력을 과시한다. 이들은 성범죄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성범죄자로 취급받는 것이 싫을 뿐이다. <펜스 룰, 여성을 배척하라> 중에서, p183


- 죽도록 아플 때는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감사한 기억은 차츰 흐릿해진다. 나는 낯 모르는 사람부터 가까운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어려운 순간을 지나왔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에게 신세 지는 것에 대해 너무 결벽증적으로 어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리를 두면서도 때로 우리는 침투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맺고 산다. 내가 신세를 질 수도 있고, 나에게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성격인지, 남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좀 강한 편이다. 나는 이를 조금씩 흩트려 뜨리려 애쓴다. 영원히 젊지도 않으며, 영원히 건강하지도 않다. 인간에게 환멸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극적인 순간 나를 구출하는 존재도 인간이다.

입에서 항문까지 연결되어 있듯이, 사회 구성원들은 그렇게 연결된다. 몸의 기능이 재구성되듯이 관계도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영원한 동지도 없지만 영원한 적도 없을 것이다. 곡식을 먹는 벌레, 벌레를 먹는 닭, 닭을 먹는 인간, 죽은 동물들에게서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사과나무처럼 서로가 서로를 소화시키며 산다. <소화기 내과 병동에서> 중에서,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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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식탁>> / 저자 이라영 / 출판 동녘 / 발매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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