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미 <<엄마도 퇴근 좀 하겠습니다>>를 읽는 밤
나는 지금 좀 삐딱하다.
지난밤 아이를 간호하면서 병원 간이침대에서 든 잠은,
잠이라기보다는 눈 붙임에 가까웠다.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분들의 발소리, 커튼 여닫는 소리, 아이 체온을 재는 손길 모든 게 수면을 취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이하고,
아이를 퇴원시키고,
집에 오자마자 새 밥을 짓고 찌개를 끓여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나니
엉덩이 한 번 붙일 시간 없이 24시간을 살아낸 느낌이다.
큰 아이와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신랑은 둘째 아이를 전담했다.
밤새 칭얼거리고, 뒤척였을 아이를 재우고, 챙기느라 새벽잠을 설친 신랑의 컨디션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해서 토요일 출근을 한 신랑.
남겨진 두 아이.
나는 정말이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 전에 읽은 『엄마도 퇴근 좀 하겠습니다』를 꺼내들면서
나도 모르게 '퇴근은 무슨, 흥!' 괜한 화풀이를 하고,
어쩌면 이상에 가까운 '엄마 역할' '아빠 역할' '아이 주도적인 생활' 등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조금 난감해지고 말았다.
내 마음의 삐딱함 때문에 어쩌면 이 책 속의 이야기들에 괜히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다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나만 못하는 거 아닌가.
이제 23개월을 지나는 둘째가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만지는 사이
잠깐 찾아온 평화에 안도하는 나는 나쁜 엄마인가.
컨디션을 되찾은 큰 아이가 "엄마, 심심해. 놀자"라며 안겨올 때
"엄마 좀 힘들어. 혼자 놀아 잠깐만" 하고 말하는 나는 너무 이기적인가.
물론, 안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그런 엄마가 나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걸.
저자 역시 지나온 그 힘든 시간들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조금만, 한 반 짝만 노력하면 아이는 스스로 성장해 갈 힘을 얻고,
엄마도 자신의 중심을 잡으면서 육아 후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느끼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다독이는 말이란걸.
그러니까. 알면서도 괜한 심술을 부리는 중이란걸.
나는 지금 정말이지 삐딱한 거다.
스마트폰은 쥐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의 대화에 방해가 된다고 아이를 네모난 상자 안에 가두고 싶지는 않았다. 36개월 전에는 절대로 미디어에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나만의 원칙이 있었다. 잠깐의 불편함을 못 이겨 아이의 울음에 넘어가 스마트폰을 주고 나면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모든 순간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옆 테이블 아이가 뽀로로에 열중하고 있는 걸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몸을 움직이다 유아용 식탁이 넘어가는 걸 붙잡은 적도 있다. 중간중간 짜증을 부리거나 아이가 의자에 앉아 있기를 거부할 때면 나 역시 내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꼭 중요한 타이밍에 아이는 떼를 부렸다.
'줄까 말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아닌 것은 아니다. 잠깐의 편안함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말자며 수없이 되뇌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사이 아이는 커갔다. 은찬이 여덟 살이 된 지금, 그때 내 선택을 믿는다. 혼자 놀 줄 아는 아이, 멍 때리다 무언가를 뚝딱 창작해내는 아이, 엄청나게 집중력을 발휘하는 아이...... 이는 모두 미디어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그간의 노력 덕분이다.
- < 위기의 아이들 : 스마트폰, TV 중독 36개월을 사수하라> 중에서, p46
나 역시 아이가 한 명일 때는 36개월 즈음까지 최대한 스마트폰도 TV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둘이 된 뒤, 나는 그 내적 갈등에 손을 들고 말았다.
여전히 스마트폰을 내어줄 때 갈등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려고 애쓴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야. 아이가 미디어에 시간을 쓴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 함께 놀아주면 돼.
그전에 내가 좀 쉰다고 해서 나쁜 엄마는 아니야.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어'라고.
어쩌면 자기 합리화 일지도 모르는 이런 나의 애씀이 지금 나에겐 최선이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세상을 바꾸는 '교육'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학교로 간 저자는 '세상을 바꾸려면 아이들이 변해야 하고, 아이들이 변하려면 엄마들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아들 은찬이를 낳고 깨달았다'라고 했다.
그 이후 저자는 '엄마'와 '나'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며 사는 방법을 생각하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독서모임 '로미 책방'을 통해 같은 고민을 하는 엄마들을 만났다.
지금은 블로그로, 유튜브로, 책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도 독박 육아 중인 엄마들의 퇴근을 돕겠다는 사명감으로 전국을 누비며 상담, 코칭, 강연을 하는 삶을 살고 있다(저자 소개 발췌)
누구나 생각은 많이 하지만 그 생각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자신이 깨달은걸,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을까.
그걸 직접 실천하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나도 육아 퇴근하고 싶다,고 외치는 엄마로 말이다.
직접 아이들을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에서 17년을 근무하면서, 학과와 학생들을 직접 대해야 하는 수업, 교육과정, 수강신청 등등의 업무를 맡아하면서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여전히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부모들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아이 대신 아이의 사정을 이야기하거나, 컴플레인을 할 때마다, 대학생이 씩이나 된 아이들이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대뜸 예의 없는 말을 툭툭 내뱉을 때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뭘까,를 고민했다.
나의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나는 무엇을 알게 해줘야 할까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 아이들을 직접 키우는 '엄마'의 입장으로 돌아왔을 땐
악, 소리를 수시로 내지르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사람, 엄마임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그 간극을 좁히는 일이 내게는 늘 남겨진 숙제 같았다. 아마도 그건 여전히.
책을 통해 도망 다니면서 '나'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 역시
'엄마'와 '나'사이에서 어떻게든 잘 버텨보고 싶다는 간절한 발버둥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엄마는 철저히 감정노동자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자식을 키울 때 먹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 해도 훌륭한 부모 소리를 들었다. 우리 부모 세대는 경제력이 경쟁력이었다. 오죽하면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나왔을까. 요즘 부모는 어떤가? 경제적 능력뿐 아니라 말도 교양 있게 해야 한다. 거기에 아이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고 비폭력 대화를 하는 우아한 엄마로 거듭나야 한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내고 제공하고 있으면서 내가 놓치는 것은 없을까 고민하고 나만 몰라서 못 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얼마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이 들까.
나는 엄마인 자신을 돌보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 영혼의 배터리가 채워지지 않은 채 계속 아이에게 주기만 한다면 엄마는 결국 말라죽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어쩌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채워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다. 가끔 물 주는 걸 깜박하면 받은 건 생각하지 못하고 왜 안 주냐고 원망한다. 상처받았다고 말하며 방문을 쾅 닫아 버린다. 아이를 키우는 건 장기전이다. 내가 말라가는데 내 안의 물을 박박 긁어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준다 한들 아이들은 모른다. 그러니 나 자신부터 챙겨야 한다.
- <건강한 대화를 위해 : 엄마도 엄마의 시간이 필요하다> 중에서, p218
내가 읽어낸 이 책의 핵심은 이 문장에 있었다.
'엄마'인 '나'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 시간을 찾아 오롯이 자신이 되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것.
누구나 생각하고, 알고, 원하지만 참 쉽지 않은 그것.
책에는 '아이와 정말 통하는 엄마의 말 사용법. 엄마의 말이 바뀌면 아이의 행동이 바뀐다!'라는 구호 같은 문장이 표지에 적혀 있다.
책 속에는 저자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노력을 통해 이뤄낸 엄마와, 아이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남편은 육아를 돕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
어린이집을 선택하고, 선생님들과 소통하는 방법 같은 실전에 필요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밑줄을 그은 문장도 많았고,
나도 조금 더 노력해보면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게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쩐지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곳의, 다른 환경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낯설게 다가온다는 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경험해보니, 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 혼자, '엄마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아.
아니, 엄마가 달라져야 한다는 그 말이 어쩐지 너무 '엄마에겐' 가혹한 거 아니야.
같은 생각들을.
육아휴직조차 쉽게 쓸 수 없는 워킹맘으로,
여덟 살, 두 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나'도 지키면서 '아이'도 잘 키우면서, '남편'과의 협력도 잘 해내면서 살아야 하는 일이
모두 엄마인 '나'에게만 주어진 책임 같아 억울해지기도 한다.
구구절절 설명이 너무 길었지만,
결국 나는
그냥 부러워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내가 하지 못하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대해 연습과, 노력과, 실행을 통해 옮겨 낸 저자의 이야기들에.
아니면,
좀 다르게 말하고 싶었거나.
아무리 좋게 돌려 말해도, 육아에는 엄마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걸 인정하자. 인정하면서 적어도 그 희생을 훗날 억울하게 느끼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방어막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그게 '나'를 지켜야 하는 지금 나의 최선이라고 말이다.
<책 속에서>
- 아이가 어른과 대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편견이다. 어릴 때 부모님 친구들이 집에 오시면 문에 대고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음성을 들어보고자 온 신경을 문밖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궁금했다. 물론 엄마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저 어른들의 세상이 궁금했다. 고2 때 PC 통신이 나왔고, 고3 때 처음으로 이메일을 만들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책이 귀했던 시절 나는 세상을 알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손님 왔으니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 엄마가 야속했다.
그 시절 기억 때문에 "애들은 가, 애들은 가"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끌어들여 대화에 끼워준다. 사실 아이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 이야기라면 애당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어른들의 대화에 입 다물고 있어줄 아이를 위해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일 따위는 안 해도 되는 것이다. p50
- 내 아이의 속상한 감정만을 앞세워, 내 아이가 다칠까 봐 상대를 나쁜 아이로 규정짓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행동이 잘못된 경우는 있지만 사람 자체가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말자.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집 아이도 소중한 법이다. 자신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모든 아이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이해하려 한다면 생각보다 문제는 쉽게 풀릴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볼 때 가지는 마음이 늘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아이가 뭘 잘못했는지를 보며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아이가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생각했다. 어른들의 섣부른 판단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p179
- 아이의 일을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화가 올라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그 모든 일이 엄마에게 전가되면 짜증이 올라오고 참고 참다 터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와 엄마의 일을 철저히 분리해야 과부하가 걸리지 않는다. 저녁밥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아침에 먹은 설거지도 해야 하는데 아이가 옷도 벗지 않겠다고 떼를 부리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엄마는 이성을 잃는다. 아이가 스스로 샤워하는 사이 저녁밥만 준비하면 되는 상황이어야 엄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아이가 여섯 살 때부터 주말부부를 하게 된 우리 가족. 평일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에 아빠는 늘 아이의 일을 다 해주려 했다. 옷도 입혀주고, 밥도 먹여준다. 그러다 엄마가 슬쩍 빠진 뒤 아이와 아빠만 남겨진 집은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며칠 전 남편은 자신은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엄마와 만들어놓은 습관을 가끔 오는 아빠는 흔들어놓았고, 아이는 그런 아빠 마음을 알 리 없다. 아빠가 기분 좋을 때만 해주고, 힘들어서 지칠 땐 스스로 하라고 하니 아이는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니 말을 듣지 않을 수밖에.
사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은 아이 기준에서 엄청난 폭력이다. 이말인즉 '아이는 어른 말에 복종해야 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니 복종하지 않는 아이를 향해 어른들은 분노를 품을 수밖에 없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은 우리 아이를 문제아로 만들어버린다.
부탁은 누구든, 언제나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거절을 전제하지 않은 부탁은 무늬만 부탁일 뿐 강요이고 폭력이다. p192
- 건강한 대화의 시작은 제대로 된 방향에서 출발한다. 돌고 돌아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닌 직접 당사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직접 말할 수 없다면, 편지나 메일로 속상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어떨까. 들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내가 본 그대로를 전하고 내가 속상한 부분을 전달하면 오해가 싹트는 것을 막을 수 있다. p175
<<엄마도 퇴근 좀 하겠습니다>> / 저자 정경미 / 다연 / 발매 2019.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