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끝으로 조심조심 걸어가는 중이야

-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는 헤어지는 중입니다>

by 목요일그녀


곡두

눈앞에 없는 사람이나 물건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는 현상


시집에 실린 마흔네 편의 시에는 곡두 1, 곡두 2, ..... 곡두 44까지 또 다른 제목이 붙어있다.


시인의 시들 속에서 허수경을 만나고, 김용택의 목소리를 듣고, 황현산의 글을 떠올리고, 준이를 상상하고, 알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그려보다가, 이주여성의 녹록지 않은 삶에 귀 기울 이 다 가, 장석남의 시를 떠올리다가, 최승자의 시를 찾아 헤매다가 제자리를 찾기까지 시를 읽는 시간 내내 즐거웠다.


시인의 시들은

개인적이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언가를 자꾸 꺼내오게 했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마음, 외면했던 사람들, 안타까웠던 마음들, 아픈 입술, 그 입술을 움직이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까지.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아프지 않게, 밉지 않게 한다는 게 시 속에서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열하고도 하루쯤 전일 거다
- 곡두 21

선생님
동치미랑 아욱된장국 가져왔어요.
좀 드셔보세요.

쳐다만 보시었다.
느리게 눈만 끔뻑거리시었다.

시간이 갔다.
시간은 가고
우리는 안 가는 것이었다.

다......
먹었다......

입에 귀를 갖다 대니
그리 말씀하셨다.

2018년 7월 29일이었다.

*2018년 8월 8일 황현산 선생님이 별세했다.



보였는데 안 보이는 일, 들렸는데 안 들리는 일.
만졌는데 안 만져지는 일. 그렇게 있다 없는 일이여 없다
가도 있는 일이여. 기적은 왜 울리지 않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가. 사는 일의 사나움이여 사는 일의 사
사로움이여. 아무려나 그 사는 일에 있어 닿고 닿는 그
마침에 내 모자람이 큰 듯하여 오늘도 나는 미치고 폴짝
뛰고나 있는 것이지.
- <기적은 왜 울리지 않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가> 곡두 15 중에서, p41


면담하러 학교 갔다 온 엄마가 다 좋은데 좀 산만하다
는 담임선생님의 나에 대한 지적에 63빌딩이라도 무너
진 양 호들갑을 떨 때 나는 오만한 어투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서둘러서 서툰 거야 서툴러서 서두른 게 아
니고." 생각이 너무 많으면 전혀 안 생기는 생각. 영이 영
영이 되는 생각.
- <서둘러서 서툰 거야 서툴러서 서두른 게 아니고> 곡두 11 중에서, p33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니까 나 보고 떠
주는 그 한 삽의 마음. 보이는 마음은 써야 하는 마음. 쓰
인 마음은 읽어야 하는 마음. 읽힌 마음은 들킨 마음. 들
켜진 마음은 번지는 마음. 시는 그렇게 들불처럼 퍼져서
비밀이 안 되어야 하는 마음. 옥상에 눕혀놓은 삽이 그래
서 몇 자루라고? 너무 많은 삽은 욕심일 수 있는 마음. 하
나여도 충분한 마음. 둘이면 헷갈리는 마음. 셋이면 하나
도 안 보게 되는 마음. 이 마음. 아직은 오늘이 어제가 되
는 시간을 살고 있는 나의 마음. 이 마음. 그건 오늘 내가
쓴 시를 내일 내가 읽을 수 있고 오늘 내가 읽은 것을 내
가 내일 찢을 수도 있는 나의 마음. 이 마음. 편애보다 편
육이 편하다고 말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나의 마음.
이 마음. 가없이 낳고 가 있다는 솔직함이 말이 되는 나
의 마음. 이 마음.
- <네 삽이냐? 내 삽이지!> 곡두 13 중에서, p26


새끼손가락 끝으로 괜히 건드려서는
동동 구르게 된 건 내 발인데
못 씻고 있는 건 내 손일 적에
박제하지 아니하여도 알게 하는
차분한 차가움의 온도여.
여정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멈춤이래도
너는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이 갔대도
당신은 당신이 있는 곳으로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내 속의 내가 나는 아니라 할 적에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사물이 사물 속으로 들어가듯
사물이 사물 속에서 나오듯
감동하지 않고
나는 이제 더 이상
헤아리지도 않는다.
- <우리는 그럴 수 있다> 곡두 33 중에서, p94


그래서 당신이
물이었는지 내가 돌이었는지 헷갈리는 사이 어느덧 낮
12시를 가리키는 시계. 그래서 끝인가. 그래서 끝일까.
누가 먼저 말했나, 끝. 왜 아무도 말 안 하나, 끝. 끝을 말
하면 끝인 거고 끝을 말하지 않으면 끝이 아닌 건가. 끝
은 이상하게 끝이라고 말 안 하지. 가만히 두고나 보지,
끝.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팽개쳐놓음의, 끝. 그
글자 모양새가 중식도를 닮아 끊고 빻는 데는 하여간에
선수인 것 같은, 끝. 이쯤 해서 우리에게 온 건가, 끝. 이
쯤 하니 우리의 이름인가, 끝. 선을 긋느라 자주 쓰인 칼
끝에 이르다 싶은 녹이 슬어 있었다. 아무렴, "부지불식
간"이라는 제목을 달아야 완성이 될 시가 아닌가 싶었다.
- <하여간에 선수인 것 같은, 끝> 곡두 17 중에서, p44




차분하게, 때론 경건하게, 자주 유쾌하게, 종종 애달프게

시인의 시를 읽었다.



내 곁에, 우리 곁에 언제나 함께 머무를 것 같은 이들의 떠남을 경험할 때

자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을 벗어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버벅거리면서,

힘겹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삶, 그래야 하는 삶 앞에서

자주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다.


끝나지 않을 이야기.

사라지지 않을 사람들,

그러니 끝, 이 아니라 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나.


어쩌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다시 불러들이고 싶어서

앞으로 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들은 헤어진 게 아니라

아직은 헤어지는 중이니까.



15918559.jpg?type=m3&amp;udate=20191224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저자 김민정 / 문학과지성사 / 2019.12.1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일 조금씩 나를 단련해 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