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는 밤
건물의 입구에는 입주 회사의 명패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일층엔 재규어 매장, 이층엔 이탈리아 대사관, 그리고 삼층이 우리 회사였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출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왠지 한남동과 재규어와 이탈리아까지 내게 한결 가까워진 느낌. 자동 회전문이 일정한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공간이 잠시 생길 때마다, 건물 안의 서늘한 바람이 잠깐씩 새어 나왔다.
커다란 문이 회전할 때마다 상기된 볼이 살짝 시원해졌다가 다시 달아오르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이 문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내가 앞으로 오래오래 다니게 될, 나의 회사.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쩐지 회전문이 지나치게 빠르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면 어느새 칸막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 이상해. 무서워. 갑자기 별별 두려움이 다 몰려들었다. 혹시 추합이라고 무시하면 어떡하지? 나이 많다고 괄시하면 어떡하지? 나 빼고 다 친해져 있어서 따돌림당하면 어떡하지? 겨드랑이가 젖어 있다고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건강검진에서 치명적인 질병이 발견되었다고 입사 취소되면 어떡하지?
-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 중에서, p163
스물세 살,
첫 출근하던 날을 떠올리는 중이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동네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와 사회를 가르치고 있었다.
가르치는 일과,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뭔가 아쉬워, 하는 마음이 들 무렵이었다.
졸업한 대학에서 채용공고가 있었고, 학교에서 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덜컥.
그렇게 입사해 올해로 입사한 지 17년(아, 정말 시간이 빨리 흐르는구나).
학교로 수업을 들으러 갈 때와는 전혀 다르게, 졸업할 때까지 매일 드나들던 곳이었는데도
강의실이 아닌 사무실로 가는 길이 어색하고, 낯설었던 기억.
처음 사무실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배치받고, 업무를 시작했을 때의 긴장감.
다시 떠올려봐도 그때의 나는 참 어리고 미숙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냥 하라는 대로, 시키는 일을 해냈던 것 같다.
몇 년에 한 번씩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또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을 다잡고 출근을 했다.
그 시기를 지나, 후배 직원들도 생기고, 어느 정도 내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되니 어느 순간부터 첫 출근하던 그때의 설렘과 두려움은 잊고 살았다. 이제는 반복되는 일에 대한 회의, 육아와 직장일 사이에서의 버거움 같은 것들이 더 먼저 다가온다.
지금은 2,30대가 취업 시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자주 절망하고 주저앉는지 통계로 보고, 기사로 읽고, 주변 지인들을 통해 듣는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이 치열한 시기에 20대가 아니어서 다행인가 같은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어떤 위로도, 어떤 말로 덧붙이기 미안한 시대.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이 입소문을 타고,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감한다는 평을 남기는 게 어쩐지 좀 씁쓸한 이유다.
나는 언니에게 받은 만큼만, 딱 만이천원짜리 선물을 사서 축의금 대신 줄 거라고 했다. 듣고 있던 구재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응, 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냥 내가 내줄게."
(중략)
"지금 뭐라고 했어?"
"축의금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해. 그까짓 오만원 내가 내준다고."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그깟 오만원 아끼려고 내가, 이러는 것 같아?"
어째서인지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 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 <잘 살겠습니다> 중에서, p27
"우리가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뭐야,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만 수화기에 남아 울렸다.
"저 지금 택시 탔어요."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지훈씨. 지훈씨는 능력 있고 인기도 많잖아. 내가 다 알아요. 일 잘하지, 직장 번듯해, 응? 또 잘생겼고, 또 몸짱이시고."
이 말을 하면서 지유씨는 살짝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웃는 건가. 기분이 확 잡쳤다.
"얼마든지 또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잖아요."
마치 어린애 대하듯 구슬리는 말투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나는 마치 아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제발 한번만, 한번만, 하면서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날 어르고 달래서 재우려 했다.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 타야 하잖아요. 이제 얼른 씻고 자야죠. 응?"
그런 기이한 작별 인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렇게 끊으려는 자와 끊지 못하는 자의 실랑이가 한참을 더 이어진 끝에 통화가 끝났다. 세상 질척거리는 통화였다. 심지어 나는 울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뚜껑을 닫지 않은 채로 올려놨던 작은 생수병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바닥에 두었던 백팩 위로 물이 쏟아졌다. 나는 황급히 백팩을 집어 들었다. 백팩의 앞주머니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이 씨발년이. 열었으면 닫아놔야 할 거 아냐. 소중한 황금연휴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가 지유씨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또 눈물이 났고 그렇게 눈물의 악순환 속에서 잠이 들었다.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중에서, p96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 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 대 중반, 이제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 <도움의 손길> 중에서, p142
월급이 두 달째 밀렸을 때 아빠가 쓰러졌고 엄마가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외주 제작사 일의 비중을 줄이고 아르바이트의 비중을 늘려나가다 결국은 풀타임으로 취직했다. 큰 기업은 아니지만 건실하다고 알게 모르게 소문난 식품회사의 회계팀이었다. 그나마도 경제학을 부전공해서 가능한 일이라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최종 합격 통보를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을 때, 아마 밤 열시였을 거다. 소식을 들은 엄마는 아빠가 잠든 육인실 병상에서 숨죽여 울었다고 했다.
연봉 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이 되면서 회사에서 가족 의료비도 지원해 주었다. 아빠는 그 돈으로 수술할 수 있었다.
- <탐페레 공항> 중에서, p206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잘 읽힌다. 막힘없이. 이해나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머리 아프게 앞뒤 내용을 연결 지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쉽게 이해되고 적당히 공감된다. 문장이 너무 좋은 것도 아닌데, 대단히 마음에 남는 것도 아닌데 좋다, 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평론을 쓴 인아영 평론가의 문장을 읽으며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감정에 침잠해 있기보다는 가볍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 개인들은 특별하게 빼어나지도 눈에 띄게 뒤처지지도 않는다. 이들은 대단한 환상을 품게 하는 커리어 우먼이나 거대한 구조와 싸우는 정의로운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도 아니다. 다만 노동과 일상의 경계를 명민하게 알고,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이 시대 가장 보통의 우리들이다. <센스의 혁명> 중에서, p215」
<<일의 기쁨과 슬픔>> / 저자 장류진 / 출판 창비 / 발매 2019.10.25.
너무 사실 같지만, 너무 냉정해 보여서 그게 현실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읽기도 했다.
어여쁘게만 보이고, 가장 좋은 나이로만 보이는 나의 후배 직원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됐다.
그들 모두가, 혹은 여전히 어떤 세계로, 조직화된 사회로 진입하고자 애쓰고 있을 모든 젊은이들이 '일의 기쁨과 슬픔'을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