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은 내가 먼저 읽어 주기

- 변지영 <<내 감정을 읽는 시간>>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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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것 하나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선택했다고 할 때에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가 대부분이니까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택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예상했던 것에서 상당히 빗나가는 일들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방향은 대충 맞춰서 간다고 하지만, 우리의 여정 안에 담길 디테일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 길이 없지요. 그 디테일이 결국은 일상이고 삶인데도 말이지요. 그러니 앞으로의 삶에서 예측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모호함을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삶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내어 명확하게 정리하려는 것은 애초에 부적절한 시도일지도 모르지요.
- 1부 <알 수 없는 감정들> -'모두들 어디로 가는지 누가 아는가?' 중에서 p19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여덟 가지의 감정에 대해 먼저 언급(위의 표) 한 것은, 이 책을 읽을 누군가에게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힘든 감정,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감정, 취약한 감정이 모두 다를 테고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책을 읽으면서 그 감정들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그때마다 자주 '모든 페이지 말고, 내가 알고 싶은, 읽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읽으면 더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만약, 어떤 특정한 감정 때문에 힘들다면

그 힘든 감정 상태 때문에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쓸 여력조차 없다면

왜 그 감정이 문제인지, 그 부분부터 정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물론 나는 이 책을 쓴 저자도 아니고, 이 책이 그런 감정들에 매우 적합하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정의 재구성'이라는 걸 통해,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의 감정을 조금은 객관화시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타인의 사례를 통해 나의 사례를 대입해 보고, 나의 상황과 처지에서 나는 그럼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감정을 다루는 혹은 심리학을 다루는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적 지향에 따라 '부정적인 감정에, 불편한 감정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른데 이 책에서 대입하고 있는 이론은 '생각도 감정도 본질이 아니다. 둘 다 내버려 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라는 입장에 가장 가깝다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 감정의 내용에 집착하며 좋은 것으로 바꾸려 하기보다는 '맥락'을 들여다보려는 시도(p13).


각 감정들마다 저자가 직접 상담하거나 만난 사례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무엇을 생각해 볼 만한지 이야기해준다.


좋았던 부분이 바로 그 지점. 실제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 것도 물론 좋았지만 내가 보았거나 아직 보지 못했던 영화 속 이야기, 감정들의 재구성을 통해 지금 나의 감정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게 꽤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읽기 편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심리학을 다룬 책들이 개별 사례자의 구체적인 사례 나열이거나, 때론 이론에 더 비중을 두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쉽게 읽히면서, 이해도 잘 되고, 공감도 되는 (나에게는 꽤) 괜찮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감정은 2부 <'나' 자신이 드리운 그림자>에서 다룬 ' 죄책감'과 ' 수치심'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시간과 함께 쌓여가는 것이듯, 자신감도 자신이 해온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고 사랑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전념해 잘 살아가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내가 어떤지, 괜찮은지, 사랑받을 만한지, 유능한 지 등등 온갖 주제로 자신에 대한 생각을 자주 오래 하는 사람일수록 우울해지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보고하는 심리학 연구가 많습니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내게 문제가 있어서' 저렇게 된 것 같고,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지기만 해도 '나 때문'인 것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평소에 자기가 어떤지 너무 자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지나친 죄책감과 수치심에 자주 시달립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나'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된 감정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2부 <'나' 자신이 드리운 그림자> - '자신이 마음에 든다거나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 중에서, p75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인데도 '내게 문제가 있어서' 저렇게 된 것 같고,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지기만 해도 '나 때문'인 것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평소에 자기가 어떤지 너무 자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


이 감정이 한동안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닌, 나를 힘들게 한 감정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 감정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아주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죄책감에, 수치심에 자주 시달리다는 문장을 읽고 나자 무언가 그동안 막연히 고민만 했던, 두려워했던, 불편해했던 내 감정들이 조금 명확하게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그런 내 감정들이 '자존감'이 낮아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죄책감이나 수치심 역시 '자존감'과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보다 '나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지 너무 자주 고민'한다는 말은 어쩐지 아주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죄책감은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다는 느낌입니다.

소시오패스처럼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못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에는 죄책감을 너무 과도하게 느껴 고통받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실수로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털어놓으며 관계를 회복하고 예전보다 더 좋은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죄책감은 관계를 꾸준히 가꾸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중략)
해소될 수 없는 죄책감, '나에게 죄가 있다'라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가지면 가까운 사람들과 연결되지 못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나 소중한 것에도 전념하지 못합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계에서 스스로 발을 빼고 말지요. 이런 경우 죄책감은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서서히 질식시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무기력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 <죄책감의 출구 : 용서받을 기회를 맞이하는 것> 중에서, p87


내가 가지는 죄책감은 대부분 아이들을 향해 있는 감정이었다.


'엄마가 돼서 이 정도밖에 못해주네.' '일하는 엄마라 아이를 너무 외롭게 하는 건 아닌지' '다른 엄마들처럼 잘해주지 못하는 건 아닌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짧은 건 아닌지' 같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죄인이라도 된 듯 괴로워했던 적이 많다.


그런 감정들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데는 아이가 자라면서 쌓아진 나와 아이의 관계도 물론 있지만, 그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많은 책들 덕분이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잘하는' 엄마가 되기보다는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 되기를 택했고, 나를 자주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죄책감'이라는 감정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떤 감정이든, 누군가를 옥죄는 어떤 감정이든 그냥 생겨나는 건 아니다.

깊숙이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면 분명 그 감정들과 연결된 어떤 사건 혹은 연결된 누군가가 있다.


나 같은 경우 대부분은 '엄마'였다.

'절대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 엄마를 향한 미움, 원망 같은 감정들을 해소하지 못해 다른 형태의 감정들로 표출되었다.

엄마와의 관계를,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을 정리하고 조금씩 해결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진 관계들이, 감정들이 생겼다. 그걸 느꼈을 때 얼마나 안도했던지.


원망은 우리를 갉아먹는 감정입니다. 삶을 피폐하게 하지요. 하지만 스스로 털어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가까운 친구나 연인,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여의치 않을 때에는 심리 상담과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불가피한 일을 겪었더라도 너무 오래 간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원망 때문에 어떤 결정을 하면 그 선택이 자신에게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으니까요.
- 원망의 재구성 <내 삶의 주도권 '한 조각'> 중에서, p186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은 대부분 '원망'이었다.


만약 내가 그 감정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면 어땠을까.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또다시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하고, 그런 선택까지는 가지 않도록 도와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지난 삶이 어떻게
지금의 감정들을 만들어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나를 괴롭히는 감정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내버려 두지 말고 나의 감정과 더불어 그 사람의 지난 삶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완벽한 이해는 아니더라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한 번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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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을 읽는 시간>> / 저자 변지영 / 출판 더퀘스트 / 발매 2019.07.01.




덧붙임


1. 내가 가진 감정들에 집중해서 좀 더 관심 있는 부분들을 집중해서 읽었다. 다른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혹시 힘들어하는 감정들이 있다면)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한다. 우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부터. 그러고 나면 내 옆의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지 않을까.


2. 이 책이 이야기하는 부분에 대해 저자는 에필로그에 적어두었다.


「이 책은 감정에 대한 구체적 알아차림이 감정 경험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정서에 관한 가장 포괄적 설명을 담고 있는 정서 구성론(또는 구성된 감정 이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이론을 토대로 <<내 마음을 읽는 시간>>에서 정서 분별이 정서조절에서 왜 중요한지 설명한 바 있는데, 많은 분들이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해하고 해독하는 작업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감정을 안다는 게 ㄷ대체 무슨 말이야?'). 이 책은 그런 궁금증과 호기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막상 집필을 마치고 나니 적절한 응답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족하다면 메일을 보내주세요. 또 열심히 연구해서 보완해 응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3. 저자가 언급한 이전 책 『내 마음을 읽는 시간』은 다음에 읽을 책 목록에 살포시 얹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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