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뭐였을까

- 김세희 <<항구의 사랑>>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어느 글에선가 나는 사춘기가 스무 살이 지나서 찾아왔다고 쓴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나의 슬픔이나, 외로움이 그냥 하루를 살아가는 일처럼 당연하다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어렸다. 어쩌면 아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둘러쌌던 가정의 불화나 그로 인한 상처도, 같은 학년 남자아이를 보면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감정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 것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만큼 나는 어렸거나, 누구도 내게 그런 감정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그땐 다 미쳤었어."


지나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것들. 혹은 내내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말할 용기가 없었던 일들. 지나간 추억으로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큰 이야기들.

나의 지금을 만들었을 수도 있을 유년의 일들.

나는 가끔 그런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아쉬울 때가 있다. 어쩌면 이것도 내 마음대로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않거나 일 수도 있겠지만.


여자 친구를 좋아한 적이 있나. 물론 있다. 많다. 아주.

그 아이들을 좋아할 때 내 마음이 어땠지. 그것도 사랑이었을까.


선배와 둘이 있을 때면 느닷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키가 컸으므로 내 시선은 언제나 그녀의 어깨나 등에 머무르는 때가 많았고, 난 두 팔로 그녀의 몸을 휘감아 꽉 껴안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이상의 신체적 접촉을, 사랑의 행위를 내가 원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상을 원했던가? 그 이상의 육체적 행위에 대해 난 아직 무지했다. 특히 여자들 사이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래서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난 하루 종일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녀와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었고, 그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녀도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을 나를 보며 느끼는지 궁금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데도 그녀와 마주하면 그녀의 존재는 놀랄 만큼 신선했다. 그녀의 매력은 내게 고통스러울 정도를 빛을 잃지 않았다. 뭔가 말할 때 그녀의 눈과 입매는 시시각각 달라지면서 무척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나는 그저 생각했다. 아, 나도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이럴 줄은 몰랐는데.
p97



연극반에서 만난 민선 선배를 사랑했다고 말한 나는, 스무 살이 넘어 남자와 만나고, 잠을 같이 잔 뒤에 다시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해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그땐 다 미쳤었어."


한 여자아이가 있다.

어떤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었다.

늘 같이 있고 싶고,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싶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함께 살 게 될 거라 생각했던.

이십 대가 되고, 진짜 어른이 된 뒤 남자 친구를 만나고, 남자 친구와 함께 밤을 보내고, 그냥 다른 평범한 이십 대 여자들처럼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었다고 믿는 한 여자아이. 어른이 되었지만 어쩌면 이 첫사랑 이야기를 끝내 하지 못했다면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을.


이 소설은 ''여자를 사랑했던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로 시작되었지만,

그래서 처음엔 조금 낯설었지만(어쩌면 '여자'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다 읽고 나니, 이건 누구에게나 있었을 어느 한 시절, 중요했던 한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여자든 남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가졌던 유년의 한 시기를 가졌다는 것.

그 이야기를 고백하므로 인해서 아이에서 진짜 어른이 되었을 누군가의 이야기. 혹은 나의 이야기로.


긴 시간 동안 이 해변은 내게 쓰라린 장소로 남아 있었다. 오래전 민선 선배는 이 모래밭에 "사랑해!!"라고 썼다. 그때 난 열여덟 살이었고, 선배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 뼈아픈 실패를 뜻했고, 떠올릴 때마다 쓰라린 좌절을 안겨 주었다. 난 선배를 원망했었다. 과녁을 맞힐 수도 있었을 그 말을 환한 햇살 아래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그래서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선배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이 글의 후반부를 쓰고 매만지는 동안 나는 그 장면이 더 이상 내게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 장면은 여전히 슬픔을 주긴 했지만, 실패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나는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은 선배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사랑은 다른 사랑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과 몸짓은 그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금까지 난 사랑에 관해서 썼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그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p167



오래전 나는 어떤 시간들을 보냈었지.

내가 좋아했던 아이들은, 나를 좋아해 준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안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시절이 좋았다고 기억하고 있을까.

우연히 마주친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불편함 없이 웃으면서 손을 맞잡을 수 있을까.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부디, 그때의 내가 안녕했기를.

지금의 그 아이들이 모두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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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 저자 김세희 / 출판 민음사 / 발매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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