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청평사
한때 우리나라 고정원(古庭苑)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여기도 한번 가 보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 한 장을 주었다(40년 넘게 나는 그 쪽지를 간직하고 있다). 신문 기사를 오린 작은 쪽지였다. 춘천 청평사 고려정원의 발굴조사에 관한 기사였다. 청평사의 정원은 일본 서방사보다 200년이나 앞서 조성되어 일본이 자랑하는 고산수 정원(枯山水庭園)의 원류라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였다.
1000년 전 고려시대 조성된 정원을 볼 수 있다는데 기대를 안고 설렜다. 소양강에서 배를 탔다. 청평사 입구 문만 쓸쓸하게 서 있었다. 정원 답사를 위한 방문이라 그런지 사찰에 대한 기억은 없다. 숲에 파묻힌 영지와 거북바위 각자를 찾아다닌 것이 청평사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다.
지난 주말 40년 만에 청평사를 다시 찾았다.
꽃샘추위도 물러가고 비바람 세차던 궂은 날씨도 지나갔다. 꽃이 만발한 상쾌한 봄날이었다. 지인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했다. 춘천시 남산면에 위치한 우리 집에서 춘천시 북면에 위치한 청평사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예전에 청평사는 소양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오봉산 뒤쪽 길이 잘 돼 있었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이미 많은 차가 와 있었고 주변 상가도 많았다. 젊은 시절 찾았을 때의 한적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식 사하촌인 절 아래 마을은 물건을 팔기 위한 상인들의 호객소리와 봄꽃 구경을 나온 관광객으로 붐볐다. 입구 다리에서 멀리 배가 서 있는 선착장이 보였다. 배와 선착장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기억과 가장 큰 차이는 절의 위치였다. 절 위에 정원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절에 올라가는 길에 이미 거북바위와 영지가 보였다. 거북바위는 그대로인데 영지는 잘 정비된 연못으로 변해 있었다. 절의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정원답사를 위한 방문이어서 그런지 절의 모습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계단 위가 허허벌판으로 생각했는데 그곳에 기억 속의 허허벌판은 없었다.
1975년과 2008년 건물이 일부 건물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사찰 건물은 대웅전 회전문 강선루 관음전 범종각 요사채까지 자리했다. 북고남저의 지형으로 전형적인 산지사찰의 모습이다. 경내는 4개의 단으로 돼 있다. 대웅전 강선루 회전문이 주축을 이루고 이 축의 정점에는 오봉산의 봉우리가 있다. 세로의 축이 오봉산 대웅전 강선루 회전문이라면 가로의 축은 4개의 단이다.
첫 단은 건물을 두지 않았다. 대신 꽃잔디로 화계를 꾸몄다. 다음 단은 맞배지붕의 회전문이었는데 양쪽에 문과 떨어진 회랑을 두었다. 세 번째 단은 강선루라는 화려한 팔작지붕의 누각이다. 윗단에 있는 대웅전에 올라가려면 이 누각 아래를 통과하여야 한다. 세 번째 단 역시 양쪽에 회랑을 두었다. 네 번째 단은 넓은 마당과 대웅전이다. 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아 마당에는 오색등이 달려있었고 마당에 비친 오색등의 그림자가 절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대웅전 위에도 경사는 계속되고 그 위에 산신각과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절의 풍광은 계단과 축대였다. 지형상 나올 수밖에 없는 계단과 축대를 틀로 해서 단마다 건물을 앉혔다. 축대의 높이는 1m를 넘지 않아 시각적인 위압감이 없다. 계단은 주요 건물을 연결하는 중심축이다. 축에서 벗어난 계단은 기능적이고 정교했다. 건물(극락보전, 삼신각)의 진입로 주변 경사면은 낮은 꽃잔디를 심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계단과 축대에 사용한 돌의 재료와 처리 기법은 건물의 품위를 더할 수 있을 만큼 잘 어울렸다.
청평사의 백미는 고려정원(문수원정원)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한국정원은 신라 동궁의 월지인 경주 안압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조선시대 만들어진 궁궐이나 사대부의 별서다. 고려 초기 정원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한국정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상당한 놀라움이었다. 일정한 공간 안에 정원을 조성하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자연 속에서 작정자의 이상세계를 구현했다. 우리나라 정원은 시각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이다. 정원이라는 명칭보다 원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조성된 정원의 발굴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난 우리나라 원림 정원의 원류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 소개가 되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때 교수님들을 포함한 전문가 답사팀을 따라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답사팀에는 외국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른 나라 전문가들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수원 정원을 경영하였다고 알려진 사람은 고려 초기학자 이자현(1061~ 1125)이다. 그는 이자겸의 동생으로 집안이 상당한 세도가였다. 이자겸은 왕실의 외척으로 왕위를 찬탈하려고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전 이자현은 27세에 청평사에 들어와 청평거사로 불리며 베옷과 나물밥으로 생활하고 학문과 선(禪)에 매진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청평사에 문수원이라 이름을 고치고 경영한 정원이 청평사 문수원 원림이다. 그가 무슨 이유로 청평사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없으나 당시 청평사가 선(禪)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선종사찰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혼란한 현실사회를 벗어나고자 선(禪)의 세계를 동경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원은 특히 동양정원은 정원을 경영하는 사람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자현은 선(禪)에 매진하면서 청평사 주변을 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청평사에 올라가면서 만날 수 있는 바위와 계곡 폭포는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지금도 아름답다. 작정자는 이 아름다운 경관에 몇 가지 인공을 가미했다.
작정자는 바위에 글씨(淸平息庵)를 새겼다. 평평한 돌을 쌓아 주변과 어우러진 시설물을 만들었다. 청평사 오르는 길 옆 커다란 바위를 거북바위라 불렀고 물이 모이는 늪은 연못을 조성해서 영지라 불렀다. 영지(影池)는 오봉산의 봉우리가 비치도록 각도를 잡았다. 내가 처음 영지를 보았을 때는 수풀에 덮여 있었고 연못 가운데 바위가 몇 개 있었다. 복원 후의 현재 영지는 꽤 큰 규모의 직사각형이다. 연못 가운데 세 개의 바위와 연못 주위 호안은 이미 조선시대 연못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지 옆에 큰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한시가 새겨져 있다.
심생종종생 :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심멸종종멸 :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네
여기수멸이 :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처처안락국 :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뛰어난 자연경관에 매료된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글을 남겼다.
청평사 문수원 정원의 가치는 우리나라 정원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청평사 문수원 원림은 일본이 자랑하는 고산수 정원의 원류로 볼 수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고산수 정원(枯山水庭園)은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이 정원 조성의 기저에 흐르는 기본 사상이다. 불교의 선은 깨달음에 있어 직관적이다. 고산수 정원은 재료를 돌과 바위 이끼만을 사용한 압축된 디자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극도로 절제된 디자인 안에는 불교의 선(禪)에서 추구하는 본질을 추구하고 절제된 이상세계가 담겨있다.
일본의 고산수 정원이 자리하기 200년 전 이미 선불교의 중심에 춘천 청평사가 있었다. 같은 불교의 선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랐다. 기존의 자연에 작정자의 사상을 담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정원은 원림이라는 용어가 적합했다.
선에 매료된 이자현은 자연의 이용에 있어 탁월했다. 주변 계곡과 폭포(구송폭포, 식암폭포)를 살리고 꼭 필요한 곳에 인공의 요소(거북바위, 영지, 척번대)를 가미했다. 바위에 새긴 각자는 자연의 세계를 선의 세계로 승화시켰다.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 적힌 바위와 영지 옆의 한시를 읽으면 꼭 참선을 하기 위해 가부좌로 앉지 않더라도 선의 세계에 들 수 있다. 자연과 선의 세계, 청평사는 그런 공간이다.
이자현은 직접 승려가 되지는 않았지만 선승에 가깝게 선에 매진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우리나라는 선종보다 교종이 발달하였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다. 선사상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일본에서 중세의 선사상은 고산수 정원이라는 독특한 정원형태를 탄생시켰다. 선의 직관적이고 본질적인 사상을 정원에 대입시켰다.
고산수 정원(枯山水庭園)은 14세기 서방사에서 몽창국사에 의해 구현되었다. 몽창국사는 서방사 이외에도 여러 곳에 고산수 정원기법을 사용하였다. 두 문화의 융합과 몽창국사라는 천재적인 정원가에 의해 재창조된 정원양식이라 볼 수 있다. 이자현이 조성한 문수원 정원이 조성된 지 200년 후 일본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근대 명치유신이 지나고 일찍부터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던 일본은 도자기 회화와 함께 고산수 정원도 서양에 알려졌다. 이후 고산수정원은 대표적인 동양 정원 양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40년 만의 청평사 방문은 의미가 있었다.
내려오는 길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