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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깨달은 두 가지

책 읽기와 자연 즐기기

by 풀솜

어릴 때부터 책이 좋았다. 여형제가 많은 우리 방에 책상은 하나다. 여러 자매 중 누구도 책상에 반드시 앉아 공부하는 모습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랫목에는 깔려있는 이불 때문에 방바닥은 항상 따뜻했다. 빙 둘러 이불속에 다리를 넣고 책을 읽었다. 누워서 읽고 엎드려서 읽고 뒹굴거리며 떠들었고 책을 읽었다. 심심하지 않았다. 좁은 방도 답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책장은 우리들의 공간이 아니었다. 책장에는 신기한 책이 많았다. '현대인의 노이로제' '청소년 상담'.... 저자 이름에 프로이트나 융이라는 사람들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그 부모의 문제는 어떤 것인지 등등, 내가 아버지 책장에서 꺼내 읽은 책들은 뭔가 심각한 내용들이었다.


일가친척 없는 지방에서 아이를 낳고 키울 때도 책은 좋은 친구였다.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에 이동도서관이 왔다. 육아에 지친 하루하루 도서관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책구경은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한시도 가만 두지 않았다. 한 아이를 업고 한 아이 손을 잡고 도서관차에 올라 정신을 책에만 두는 것은 사치였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이 즐거워서 읽고 또 읽고,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읽고 또 읽고, 내 생각과 비슷해 신기해서 읽고 또 읽고...


나이 들고 돌아보니 삶도 인생도 뭔가 안갯속 같았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의 내용이 가물가물하고 주인공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역시 생소했다. 책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었다. 책은 글을 쓰면서 읽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책을 읽을 때 중심에 내가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심에 나를 놓아두고 저자와 이야기하는 아주 주관적인 일이다.


글을 쓰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나도 특별한 사람이다.




자연이 좋았다. 조경을 공부하고 중요한 프로젝트 설계에도 참여했다. 어디에는 무슨 나무를 심어야 하는지 무슨 나무는 심으면 안 되는지, 정원은 어떤 방법으로 가꾸어야 하는지 공부하고 연구하며 설계에 반영했다. 내가 설계한 도면은 현실이 되어 공원에도 심어졌고 아파트에도 심어졌다. 아파트의 정원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마치 내가 그린 설계도면을 보는 거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 있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은 나의 전공이다. 정원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나라 선조들의 전통정원은 물론 유럽의 유명한 정원도 둘러보고 정원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다. 나는 뭔가 많이 알기를 바랐다.


몇 년 전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반경 2킬로 안에 도청을 비롯한 각종 공공시설과 백화점 같은 상업시설이 구비된 신도시의 화려한 생활을 뒤로하고 꿈속에서만 그리던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이사했다. 나는 평소 주거환경은 아파트 가격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는 신념이 있었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은퇴 후의 삶을 전원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오래지 않은 전원생활 이었지만 나는 많이 변했다. 더 편안해졌고 더 건강해졌다. 그런 외부적인 변화보다 큰 것은 자연스럽다는 개념의 변화다. 自然(自 : 스스로 , 然 : 그러할 )스럽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의 주체가 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자연스럽게 살고자 한다. 내가 알던 나의 지식이 얼마나 일천한지 느끼고 있다.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지식 자체를 뽐내고자 공부하지는 않았나?

나는 얼마나 쓸모없는 곳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나?


자연은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들 스스로 그러그러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도 자연의 한 구성원이다. 나의 삶이 그들에게 크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그러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나?


젊은 시절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무 하나를 뽑아 들고 돌아가는 시골할머니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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