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대한 근원적 생각
특별한 일 없는 주말이면 서울 사는 동생 부부가 온다. 남자들은 당구를 좋아해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나와 동생은 별 하는 일이 없다. 동네를 걷거나 마당에 나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데 어제는 좀 특별했다. 마당 한가운데 국을 끓이기 위해 가마솥을 걸었다.
남편이 갈비집하는 친구가 주었다고 갈비 손질하고 남은 뼈를 얻어 왔다. 남편은 '머구리'라고 말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마구리'를 일컫는 말인 거 같다. 마구리는 길쭉한 물건의 양쪽 끝에 대는 부분을 말하는데 긴 갈빗대를 손질하고 양쪽에 남은 부분을 모은 소의 부산물이다.
우선 마당 한가운데 가마솥을 걸고 불을 땔 준비를 했다. 시골살이란 도시와 같이 정갈할 수 없는 것이 필요한 것도 많고 뭔가 치워야 할 것도 많다. 대부분 자연에서 나온 나뭇가지나 낙엽이다. 이런 재료들은 자연 상태에서 썩지만 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나뭇가지나 나무토막을 말렸다 연료로 사용하면 요긴하다.
남편은 땔감에 대한 욕심이 많다.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공사장을 지나다 버리는 나무토막을 보면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가져오기도 한다(땔 나무는 방부목이나 오일스텐을 바른 나무는 안되고 순수한 원목이어야 함). 가끔 가마솥을 걸면 이런 것들을 모두 태울 수 있으니 마당이 정리되는 효과가 있다.
전날부터 마구리를 물에 담가 핏물을 뺏다. 끓는 물에 넣고 데쳐 씻어서 기름을 정리하면 준비는 끝난다. 씻어놓은 마구리를 가마솥에 넣고 물을 부었다. 동생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불 땔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왔다. 동생은 불 때는 것을 좋아한다. 불 때는 것도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불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따뜻하기도 하고 너무 좋다고 신이 났다.
언젠가 먹어본 우거지 갈비탕, 이것이 오늘의 메뉴다. 밭에서 뽑아 데친 배추를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양념을 해 두었다. 진하게 고은 마구리 끓인 물에 양념한 배추를 넣고 한 바탕 더 끓였다. 동생이 가장 신기해하는 것은 김장을 위해 마당 한편에 심어놓은 배추 몇 포기를 뽑을 때였다. 아파트에서는 배추를 사 오고 다듬고 쓰레기를 버리는 과정이 너무 힘이 드는데 여기서는 밭에서 바로 뽑아 수돗가에서 씻으니 얼마나 편리하냐며 전원생활에 대한 찬사가 늘어졌다.
차린 밥상은 별거 없었다. 오늘 가마솥에 끓인 진한 우거지 사골국, 총각김치, 들기름에 들깨가루를 넣고 볶은 깻잎나물, 전에 담가 놓은 장아찌가 전부였다. 하지만 밥맛은 꿀맛이었다. 동생 부부는 이보다 더 건강한 밥상이 있을까 하며 마치 보약을 먹은 거 같다고 하루가 너무 즐거웠다고 기뻐하는데 나는 식구들 먹이라고 국 한통을 더 싸서 보냈다.
중년의 은퇴자 사이에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가 상당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자연인들은 도시민의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자신이 먹을 한 끼거리를 위해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한다. 삶이 넉넉하지도 화려하지 않다. 많은 것을 갖춘 도시민들이 왜 몇 시간씩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까?
많은 돈을 벌고 비싼 아파트에 좋은 차를 타는 것이 도시민의 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 달려가며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아파트나 차의 가격으로 결정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도시에서는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즐길 수밖에 없다.
자연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마치 불멍을 하는 것과 같이....
'자연'이라는 단어만큼 포괄적이고 주관적인 단어가 있을까?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와 대립된 개념이 일반적이다. 산업화 이후 세계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몇 백만 년 수렵과 채집하던 인간이 산업혁명 후 이룬 도시화는 농업혁명만큼이나 인간에게 큰 변화였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갔다. 도시 생활은 편리하고 효율적이었으나 자연과 멀어졌다. 자연을 떠난 인간은 도시 문명을 즐기고 있지만 분명 갈등이 존재한다. 이 갈등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하나는 '존재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상태의 개념'이다.
우리가 자연이라는 단어를 명사로 사용할 때는 지구 또는 우주의 외연으로 사물의 집합체를 말한다. 자연은 어느 사물의 특정한 상태가 아니라 '천지 만물 등의 존재, 즉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일컫는 말로 정신과 대립되는 개념인 비인간적인 사물에 집중한다.
반면 자연이라는 개념을 '상태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사물의 태초의 상태가 변화 없이 보존된 ‘있는 그대로(原生)’, 변화는 있었지만 인공이 전혀 닿지 않은 ‘저절로(自生)’ 혹은 ‘자연적(형용사)’라는 상태의 개념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자연은 이 두 개념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나누자면 천지와 만물, 산수나 풍수 등의 명사로 지시된 서구적 nature 실체의 개념과 '있는 그대로' '저절로' '스스로'라는 사물의 생성과 변화 혹은 상태의 개념이다. 두 개념을 포괄적으로 정의하자면 자연은 '생물 개체 및 개체군의 생존에 직접 간접적 영향을 미치는 조건의 총화로서 인간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상태인 자연환경'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본래적 선험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며 인간생활을 담아주는 '공간적' 조건과 빛·온도·수분·공기 흙 등과 같은 '자원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환경'을 뜻한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는 자연이 nature로 해석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시대 내지 전통시대에는 '상태의 개념'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자연관이라는 것은 실체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의 입장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 즉 '자연'이라는 개념화되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가치관을 해석하려는 철학의 입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통시대의 자연관은 소우주인 인체를 표준으로 자연의 생물과 무생물의 존재를 의인화하여 유추하는 것이 많았으며, 관념의 차원에서 신앙의 차원으로 변용되기도 하였다. 자연에 정령이 있다거나 자연에 신이 있다고 하나의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 자연숭배사상, 풍수지리 사상 등 자연과 관련해서 나온 사상이다. 이는 자연의 원류를 상태의 개념으로 바라본 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떠난 인간은 자연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자연에 가까운 동물이나 어린아이에 마음이 가는 것은 동물이나 어린아이가 인간의 동물로서의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갈망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해진다.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젊은 시절, 도시가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었다면 나이가 들면서 욕망의 성취가 마음까지 달래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려한 네온사인, 휘황찬란한 불빛. 화려한 음식, 멋진 집과 멋진 자동차.... 자연인에게는 이러한 도시 문명은 찾아볼 수 없다. 산 중턱에 땅을 고르고, 얼기설기 집을 짓고, 한편에 씨를 뿌리고, 심어놓은 채소로 겨우 한 끼 밥상을 차려 소박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자신이 먹을 한 끼를 위해 하루 종일 움직인다. 도시민은 그 모습을 TV 속 영상을 보고 있다.
영상 속 자연인의 생활을 보며 도시민의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몸이 너무 편한 도시생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너무 편한 도시생활로 인해 도리어 정신은 복잡해졌다. 도시민은 해야 할 많은 것들은 거의 정신적인 것이다.
인간은 오랜 시간 수렵과 채집으로 삶을 유지했다. 수렵과 채집의 생활은 '인간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몇 백만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스스로 움직여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끝없이 추구하던 편리함이 정신을 가두고 있다. 도시민의 움직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는 자연인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들이 부러운 것이다.
운동을 하든 걷든 직접 몸을 움직여 보라.
스스로 준비한 따뜻한 음식으로 한 끼 식사를 하고
깜깜한 침실에서 잠이 든다면 당신도 자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