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서(別墅)
별서(別墅)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만휴정(晩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언덕 입구 '어서오이소. 반갑니데이 WELCOME'이라는 문구가 붙은 낮은 문과 각종 안내문이 서 있다. 문을 들어서면 가파르지 않은 언덕으로 오르게 된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연을 만나게 된다. 계류를 따라 숲을 지나면 멀리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다리 건너 담장이 쳐진 단아한 팔작지붕의 정자가 보이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정자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주변 경관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정자보다 멋진 풍광은 외나무다리 아래 물길이다. 웅장한 계곡에 하얀 반석 위로 폭포를 동반한 곡간수가 흐르는 절경이다. 계곡은 흰 너럭바위에 소를 담고 그 물이 다리 아래로 흐른다. 어느 산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냈을까?
언덕 아래 김계행의 본가인 종택이 있다. 종택은 안채와 안채에 딸린 사랑채 보백당이라는 현판이 있는 건물 등 훌륭한 건물이 여럿이 있고 안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다. 조선시대 큰 규모의 양반가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유가 선비들은 세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수학 후 출사하여 관리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고 두 번째는 초월적 태도를 표방하며 향촌에 숨어 기회를 기다리는 길이며 세 번째는 출사 후 영예롭게 은퇴하여 노추를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길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정치에 참여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선비들은 자연과 함께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에 은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으로 은일에 대한 열망, 당쟁이나 학문적 싸움과 같은 정치상황에서 도피하고자 했던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실적으로 양반 위주의 정치체계 토지소유로 인한 튼튼한 양반층의 경제구조가 자연에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선비들의 은거는 우리나라의 자연환경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는 험준하고 다양한 지형이어서 산수가 좋은 경승지가 많다. 은거하기에 용이했다. 임기를 마치고 중앙 정치에서 물러나거나 당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 자연을 벗하며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 많았다.
그들은 조용한 사색의 공간이 필요했다. 주거공간에 사랑채가 있어도 여유가 있는 한 가까운 곳에 사색할 수 있는 자연 속에 공간을 마련했다. 초월적 은일이든 도피적 은둔이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의 공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곳이 별서(別墅)다.
별서(別墅)의 별(別)은 따로 별이고 서(墅)는 농막 서이다. 본가와 따로 떨어져 있는 농막, 지금의 개념으로 별장과 같은 제2의 주택이다. 별서는 신라시대 최치원도 경영했을 만큼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별서는 선비 혹은 양반이라 불리는 지배계층의 문화공간이다. 이들이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머물며 사색하고 시를 짓고 글을 쓰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담소하며 자연을 즐겼다.
선비들은 해가 잘 들고 식생이 다양한 위치를 골라 정자를 짓고 그곳에 머물렀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대신 인간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나 식생이나 동물 우주에 관한 자연의 과학적 현상까지 논하며 인간의 사유를 넓혔다.
조선 시대 별서는 물리적으로 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방과 온돌이 있는 곳도 있지만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시설은 거의 없었다. 일상의 생활은 본가에서 해결하고 별서는 철저히 사색의 공간이었다.
별서(別墅)는 선비들이 즐겼던 자연 속의 사유공간(思惟空間)이다.
만휴정은 조선 중기 문신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하던 곳이다. 김계행의 본관은 안동이다. 김계행은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김계행은 청백리로 유명하다.
정자의 집마루 나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걸려 있다.
" 持身謹愼 待人忠厚
(자신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몸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충실하고 후하게 대하라)"
" 吾家無寶物 寶物有淸白
(내 집에 보물이 없으며,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
보백당이라는 김계행의 호는 이 글귀에서 취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지키는데 겸손하고 신중하다.
사람을 대할 때는 충직하고, 마음을 넉넉하고 너그럽게 하라.
내 집에 귀한 것은 많지 않다.
내 집의 보물이라면 맑고 깨끗한 심성뿐이다.
조선의 선비 김계행은 정자 마루에 이와 같은 글귀를 보며 사유(思惟)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