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괜찮아도 괜찮아

마흔이 되어 되돌아본 운이 좋은 삶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어린시절은 공부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럭저럭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미용일을 배우시느라 먼길을 오가며 참 부지런히 사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엇나갈까봐 걱정을 많이하셨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주위 어른들은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셨다. 다만 시골생활의 환경에서는 학업과 진로에 정진하기가 어려웠고, 10살도 되기 전부터 장남으로써 가정을 지키는 것, 성공에 대한 열망이 나를 일찍 철들게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동기부여로 삼아 공부를 했고, 처음에는 그저그런 성적이었지만 고등학교에 갈수록 성적이 올랐다. 성적이 올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고등학교에 들어갈때는 상상도 못할 성적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 더 시험을 보겠다고 했고, 1년간의 재수 끝에 서울대에 합격했다. 나는 기초생활수급자의 신분으로, 이렇다할 사교육은 재수종합반 6개월 외에는 별다른거 없이, 시골에서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사실로 주위 어른들의 자랑이 되었다.




그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어머니의 가위다. 조그만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아침일찍부터 늦게까지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학교에 다녔다. 그 시골에서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은 온 가족의 자랑이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 더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한의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키는 일과 가족친화적인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는데, 차분하고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하고 잘 맞는다는 얘기를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서 장래희망으로 각인된 것 같다. 공부하다가 힘든일이 많았다. 내가 스스로 공부해보겠다고 하고 알바를 시작했고, 과외와 칠판닦는 일 등 여러 일을 병행했다. 문제집 살 돈을 아끼려고 소각장에서 남들이 풀다 버린 문제집을 주워다 풀때도 많았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문제집을 풀었고, 나중에는 수학문제집 한권을 다 푸는데 일주일도 안걸려서 더 풀문제집이 없어 94년도 수능부터 오만가지 책을 구해다 풀었다. 삼수생활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보다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마음이 궁핍했다고 해야할듯하다. 그러나 힘든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났던 것은 여전히 어머니의 가위였고, 나는 두번 공부를 중단하겠다고 했다가 다시 복귀해서 열심히 했다. 어쨌든 그렇게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원하는 곳에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6년간 알바를 했다. 과외, 대필, 칼럼, 독서실실장 등 정말다양하게 알바를 했다. 생활력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일부러 그런건 아니고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로스쿨에도 합격했는데, 한의대 다니다보니 우리나라 의료법이 워낙 누더기이고 한의사와 관련된 정책이 안타까운게 많은 맘이 들었다. 그러나 이때는 도저히 더 도전하기 어려울만큼 지쳤었고, 조금 다니다가 학장님께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한의사의 길로 다시 돌아왔다.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도 해서 가정도 꾸렸다. 감사하게도 두번째 한의원을 하는 지금까지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대출도 갚고 보람있게 일한다.




연고없는 신도시에 라꾸라꾸 하나 들고와서 인테리어 공사를 한지 10년이 지난지금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운이 좋았다 말고는 잘 설명이 안된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정말 10대부터 30년 가까이 정신없이 지난 것 같아 되돌아보면 별로 기억에 남는게 없는것 같기도하다. 무척 힘들었던 두어번의 위기가 시간의 간격을 알려줄 뿐이다. 그때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사춘기 시절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때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계속 문제집과 답지를 봤다. 남들은 다 알아듣는 수업을 나혼자만 모를때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속상해하지 않았다. 재수와 삼수할 때 불안함이 너무 커서 공부가 잘 안될때도 괜찮아 괜찮아 되뇌였다. 한의대 다니는 6년간 참 행복했지만 등록금을 내기 버겁다 느낄때도 괜찮다고 했다. 로스쿨을 그만둘때도 괜찮아 이제 니 일을 하면 돼 그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에 스스로 가장을 자처한 뒤로 나는 괜찮다는 말을 나에게 자주했다. 내가 두아이의 아빠인 진짜 가장이 되어서 아이들에게 자주 했던 말도 “괜찮아 애들아”였다. 우리 아이가 발달장애를 진단받고 특수치료에 생활비가 거의 다 들어가고 가정이 힘들때도 “괜찮을거야” 라고 나와 가족을 다독였다.




내가 괜찮다는 말을 스스로 한 이유는 사실은 안괜찮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안괜찮아도 된다고 생각한적이 없고 안괜찮으면 안되는 환경이 어려운 환경을 돌파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걸로 수험생들에게 강의도 했고 한의원이나 사회에서 학생을 만나면 한시간은 이야기할수 있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안괜찮아도 된다는 말을 너무 듣고싶을때가 있다. 지금 내 나이가 아버지가 먼저돌아가신 나이여서 그런거같기도 하다. 아마도 아버지가 지금 나이에 나와비슷한 생각을 했을것이다. 마흔이 넘어 잠시 내 삶을 되돌아보니 비로소 이 말이 떠오른다. "안괜찮아도 괜찮아" 익숙하지만 익숙하지않은 이 표현은 이제 많이 안정된 나를 위로해준다. 지금이라도 나를 위로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같이 나누고 싶다. 꼭 괜찮아야하는건 아니니 너무 자신을 가혹하게 내몰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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