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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Aug 18. 2022

다시, 길 위에 서고프다

로마로 가는 길(김혜지, 책구름, 2022)을 읽고

'이제는 안다. 나는 거대한 세상의 작은 존재일 뿐이며 생명과 사랑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에필로그> 중에서


버킷리스트 맨 상단에 자리 잡은 꿈이 하나 있다. 바로 '순례자의 길'을 걸어보는 것.


사무실을 수십 번 옮겨 다니고 수없이 컴퓨터를 바꿔 썼어도 바탕화면 배경에는 항상 순례자의 길 어느 한 구간을 옮겨놓곤 했다. 바쁜 와중에도 잠깐잠깐 들여다보며 꼭 한 번 가고야 만다고 다짐하면서.


시작은 2004년 50일의 배낭여행 때부터였다. 여행길에서 만난 밝은 표정의 순례자들. 정해놓은 일정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통해 꼭 다시 유럽의 순례길을 걷고자 마음먹었었다.


18년이 지났다. 어느덧 40대에 들어섰고 현실적인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삶에 치이고 꿈이 줄어들면서 포기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버킷리스트는 말 그대로 버킷리스트일 뿐'

'현실적으로 40~50일을 빼는 게 가능하겠나'

'여유가 없다' 등등의 이유를 핑계 삼아 길은 잊었고 꿈은 주머니 속에 넣어 버렸다.


어쩌다 보니 생각보다 긴 쉼표를 받아 들게 된 지금.

'도전이라도 한 번 해볼걸 그랬나...' 후회가 들기 시작할 무렵. 이 책을 만났다.


'마음속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되새기는 동안 해가 머리 뒤로 넘어가고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걷는 동안 계속 따라오라고 손짓하던 구름이 바람을 따라 사라졌다. 내일 하루 이곳에서 재정비의 시간을 보내고 또다시 그들처럼 흘러가야겠다. 그저 멈추지 않기 위해서. 후퇴하지 않는 나를 위해서.'(본문 중에서)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순례길은 산티아고 길만 알았다. 워낙 많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작가가 걸은 Via Francigena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길이라고 한다. 그만큼 생소하면서도 새로웠다.


잠자고 있던 버킷리스트가 꿈틀거릴 만큼.


작가와 함께 길을 걷는 동안 '다시 길 위에 서고 싶다'는 꿈이 새삼스레 밀고 올라왔다. 어떤 종교적 신념이나 거룩한 목적의식이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여느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작가의 후회와 고통, 감동과 깨달음에 온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먹고 자고 걷는 단순한 일과를 다시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깊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나는 걷는 행위가 주는 단순한 깨우침의 순간을 좋아했다. 살아 있다는 것 말고는 사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 아차 하게 만드는 순간. 지극히 사소한 일과 촘촘한 삶의 계획들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들. 결국에 남는 것은 사랑이구나. 깨우친 순간들.'(본문 중에서)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그렇지만 놓치고 사는 깨달음 비슷한 것이 있다. 길은 그 깨달음을 새삼 다시 꺼내도록 도와준다.


작가 역시 그러했다.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여정. 그 길로부터 다시 깨달았고 녹아들어 버렸다.


작가의 글을 따라 함께 걸어보니 이제 그 길을 내 두 발로, 내 눈과 폐와 심장과 더불어 걸어보고 싶어졌다. 18년 전의 다짐이 다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꼭, 걸어보리라. 머지않은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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