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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Jul 27. 2023

슬픈 자화상에 위트 한 조각 섞다

눈사람 자살 사건(최승호, 달아실, 2019)

순전히 제목에 이끌렸다. 눈사람의 자살이라. 이 책은 뭔가 있겠다 싶어 위시리스트에 품어 놓고 잊었는데 생일을 맞아 어떤 분께서 선물로 보내주셨다.


어린이를 위한 동시를 쓰기도 하고 방시혁, 뮤지 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동요집을 만들기도 하는 저자는 시인이다. '눈사람 자살 사건'은 1997년 출간했다가 절판된 '황금털 사자'를 다시 추슬러 낸 우화집이다. 총 74편의 우화가 에곤 쉴레 등 24명의 그림 작품들과 함께 실려 있다.


솔직히 모든 작품이 다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하지만 무심하게 다가와 가슴과 머리를 툭 치는 듯한 묘한 두드림과 (우화답게) 살짝살짝 현실을 비틀어 버리는 위트 한 조각이 분명 존재한다. 표제작인 '눈사람 자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눈사람은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더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하지만 더 살아야 할 이유도, 딱히 죽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다. 다만 문득 뜨거운 물과 찬물 중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어차피 그 결과는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고 무심히 꼭지를 돌린다.


슬프다. 동시에 따뜻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눈사람은 그때만이라도 행복했을까(그랬으면 좋겠다).


'들장미'라는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들길을 가다가 들장미를 보거든 잠시 걸음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들장미 한 송이 보이지 않았다.

"들장미가 없는데 들장미를 보거든 잠시 걸음을 멈추라니! 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어쩌니 오래 깊이 오직 들장미만 생각했는지 그의 온몸에서는 들장미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들장미가 정말로 존재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발견한다 한들 아름답다고 느꼈을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들장미를 보거든 걸음을 멈추라는 한 마디에 화자는 들장미에 온 관심을 내주어 버렸고 그 자체가 들장미가 되었다.


물론 그 들장미의 냄새가 향긋한지, 악취일지는 별개의 문제다.


저자의 작품들은 대략 이런 느낌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갖가지 느낌들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리석은 집착, 허울뿐인 욕망, 뒤틀려버린 세태가 꼬인 이야기의 형태로 꿈을 만나 춤을 춘다. 건조하면서도 축축한 무거움이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손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진다. 내 머리와 가슴이 온전히 모든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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