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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Dec 31. 2023

숨 쉴 틈이라도, 사랑할 틈이라도 줄 수 있는 세상이었

구의 증명(최진영, 은행나무, 2023)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모로 누워 팔과 다리와 가슴으로 상대를 옭매었다.

지독히도 슬픈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아니 이미 죽어버린 현실에서는 사랑만이 유일한 내 존재의 증명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서로에게 한없이 매달리는 두 연인의 몰락이, 눈물도 말라버릴 만큼 슬퍼 가슴이 아프다.


소설 속에는 로맨틱한 설렘도, 호기심 어린 밀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그늘 속에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새까맣게 타버려 앙상하게 말라버린 '구'와 그런 '구'만큼이나 외로운 '담'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눈물뿐인 사랑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세상에 그것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들에게, 그 이상 애틋한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절실하고 눈물겹다.


삶이 차라리 죽음보다 고통인 현실 속에서 그들은 도피하되 놓지 않고 오히려 더 처절하게 서로에게 매달린다. 그 처절함은 소멸의 강제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서로에게 뿌리를 박아 넣는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연약한 생명이 거친 돌 틈에서 숨이라도 온전히 붙어 있으려면 바위에도 구멍을 내어 뿌리를 깊이, 더 깊이 박아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소멸 앞에서, 남겨진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뿐이다.


그로테스크한 표현들 속에서 헤매고 망설이는 사람들은 소설 속 표현보다 더한 그로테스크한 세상에 우리가 던져져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는 사람들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기억해 주길. 세상의 뒷면, 세상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버티고 선 가녀린 사랑들이, 오히려 더 간절한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처럼 사랑하진 않았으면 한다. 이렇게 슬프고 처절한 사랑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세상이 젊은 사랑들을 내몰지 말았으면 한다. 숨 쉴 틈이라도, 잠시라도 세상을 잊고 사랑할 틈이라도 주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그런 '어른'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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