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비 없는 세상

by 서툰앙마

얼마 전부터 화면이 흔들리고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 마련한 LED TV는 9년을 채우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웬만하면 참고 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미세한 흔들림도 계속되면 눈이 아프다. 만화라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바닥에 널브러지는지 모르는 여섯 살, 네 살배기 아이들은 오죽할까. 양단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와이프는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이 너무 많이 본다며 이번 기회에 TV를 영영 퇴출시키자는 강경론을 펼쳤다. 나는 재구입을 주장하며 반론을 시작했다.


- 우리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보는 거야.

- 뉴스도 봐야 세상 돌아가는 걸 알지.

- 나도 어릴 때 많이 봤지만 멀쩡히 잘 컸어.

- 유익한 프로그램도 얼마나 많다고!


내 설득을 조용히 듣던 와이프가 한마디를 던진다.


- 오빠가 아쉽구나?


이런.

들켰다.


사실 그랬다. 여덟 살쯤 되었던가? 수봉공원 밑 단칸 셋방살이하던 시절, TV가 우리 집에 처음 들어왔다. 남의 집 TV를 어깨너머로 기웃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아니면 그 애처로움이 부모님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보니 14인치쯤 되는 TV가 환한 햇살을 받아가며 방 한편에서 나를 맞이했다.


뭐든 빨아들일 듯한 검고 올록한 '테레비'에 난 홀딱 반해 버렸다. 뭐든 다 보여줄 듯한 마법상자는 그렇게 내 인생에 들어와 지금껏 함께 했다. 한 번도 테레비 없는 집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테레비 없는 집이라니…! 오! 지저스!


지금 이 녀석을 구입할 때에도 당시 가장 좋은 모델을 고르고 골랐다. 10평짜리 작은 빌라에는 비좁을 정도로 큰 녀석이었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내게는 그 자체로 뿌듯함이자 새 시작의 징표와도 같았다.


그런데 9년 만의 퇴출이라니…! 가슴 한 구석을 들어내는 느낌이었다. 사수해야만 한다는 결의 같은 게 올라왔다.


- 응. 내가 아쉽네.

- 그럼 고려해볼게. 일단은 없이 좀 지내보자.


2주쯤 흘렀다. 거실에서 완전히 퇴출하지는 않았다. 켜지 않는 것 정도로 '없음'을 대체했다. 그냥 가구 중 하나처럼, 49인치 검은 평면 액자가 벽에 걸려 있을 뿐이다.


와이프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만화를 보여달라고 떼를 쓰거나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일 대신, 이내 다른 놀잇감을 찾아내고 만들어냈다. 얘네가 정말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네들이었나 싶을 정도다.


놀라운 건 나 역시 차츰 그 상황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모컨에 종종 눈길이 가기도 하지만 이내 다른 일들을 한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아이들과 놀고, 집안일을 하고… 사실 그러기에도 시간은 모자라더라.


테레비의 결핍은 아쉬웠지만 그 빈자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아쉬움조차도 다른 기대감이 대신해가고 있었다. 결핍이 아쉬웠던 것은 내 집착 때문이었나 보다. 집착을 버리니 다른 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집 곳곳에서 놀잇감을 찾아내는 아이들을 보며 내 집착이 부끄러워졌다.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들. 어쩌면 소중한 그 무엇을 말이다.


당분간은 우리 집 테레비는 '장식'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잘 수행할 것이다. 그 크고 검은 화면은 가진 것을 내놓는 역할에서, 거실을 무대로 새로운 '함께꺼리'를 만들어내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비추는 은은한 거울의 역할로 본인의 본분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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