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화병 그 사이

by 시온

창작 활동이 끝난 그해 후반,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손으로 글을 쓰는 것조차 힘들었고, 눈앞의 노트북 화면은 점점 멀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그저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버지 하고는 같은 집에 살지만 일절 볼 틈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피해 다녔고, 내가 거실에 나와 있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가 내가 내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나 또한 아버지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얼른 문을 닫고 들어갔다. 우리는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그해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내 이상 증세는 무기력뿐만이 아니었다. 가끔은 아버지의 발소리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여기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이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 선택이었음에도 주체하지 못하는 화는 가끔 그릇으로, 가끔은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던져 풀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창작 활동을 하면서 얻은 상처는 잊고 새로운 일을 하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6개월간 새로운 일을 찾아다녔고, 짧지만 다른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움직일 힘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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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해가 넘어갔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창작이었다. 평범해진 일상을 살다 문득 시나리오를 다시 펼치고, 이야기의 구조를 짜고, 캐릭터를 살리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회복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어졌다. 내가 몸담았던 창작 기관에서는 아직 한 번 더 창작을 해볼 기회가 남아 있었다. 이전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과도 다시 한번 창작 활동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트라우마만 남은 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그곳에 들어갔다. 이번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그해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회복되었고, 성격은 예전보다 밝아졌다. 작은 웃음이 돌아왔고,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며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그래서인지 작업의 결과물도 좋게 나왔다.


내가 하는 일은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는 지원작을 뽑아 단 두 명만 선발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지원을 받아 만든 장편 시나리오가 지원작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나는 꿈에 그리던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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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시나리오가 당선되고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내 일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집 근처 카페를 지나며 커피 향을 맡는 작은 시간조차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여유였다. 업무를 정리하고 캐릭터를 다듬거나 장면을 설계하는 동안, 나는 오롯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점심시간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회의 중에도 내 의견이 조금씩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하루하루를 견디며 나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전의 소외감과 공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빈자리는 조금씩 채워졌다.


성격도 밝아졌다. 예전보다 작은 웃음을 자주 지었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보이는 일에도 조금 덜 긴장했다. 퇴근 후에는 동네를 걸으며 작은 풍경을 눈에 담거나, 창밖의 하늘색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쌓여, 삶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림자가 있었다. 장편 시나리오가 당선된 성취감과 동시에, ‘누가 봐줄까’라는 허무한 생각이 가끔 스며들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불안과 설렘 사이를 오갔다. 압박감과 성취감이 뒤섞인 시간 속에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따라오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조금씩 나를 확인했다. 하루를 견디고, 창작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내게는 중요한 성취였다. 작은 글귀 하나를 완성하거나 캐릭터의 표정을 다듬는 일, 장면의 색감을 고민하는 시간, 그리고 조용히 차 한 잔을 마시는 순간까지. 모두 이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살아 있다는 감각의 일부였다.


그 시기, 나는 비로소 느꼈다. 삶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의 움직임으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전보다 단단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작은 실패나 오해로 흔들리더라도 다시 일어설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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