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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주주 Apr 03. 2024

재앙을 가져다준 영어 너란 녀석 덕분에

영어 때문에 못살아.

영어흑역사는 취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회였지만 당시엔 몰랐다. 재앙이었다. 영어가 안돼서 매일이 힘들었다. 너무나 힘들어서 일 년이 아닌, 11개월 드디어 떠났다.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 매일 고민이었다. 결국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방되었다.



구로역에 위치한 조그만 수출기업이였다. 무역을 전공해서, 졸업하면 당연히 수출 수입을 하는 회사에 취업해야 하는 줄 알았다. 취업운이 좋았다.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다니 참 뿌듯했다. 처음으로 회사 명찰을 달고, 아침에 룰루랄라 출근했다. 무역팀이었다.


5살쯤 더 많은 B 여자 과장님이 있었다. 그 위로 50대 초반의 전무님이 있었다. 두 분은 포스가 강렬했다. 신참내기 나에게는 무서워 보일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하셨다. 회사는 참 바빴다. 외국으로 기계를 수출하고 있었다. 이제 막 성장하는 회사답게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외국에서 물건을 사로 오시는 분들도 많았다. 바이어분들이라고 하시더라.



B 과장님은 제품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외국인 바이어들이 대부분이라 영어로 참 잘했다. 잘해 보였다. 나는 온갖 허드렛일을 했다. 외국인이 오면 회사를 안내해 주고 제품 설명도 해주고 다 했다. 만능으로 보였다 영어를 잘하는 B과장님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 부러워도 보였다. ‘나도 영어회화 공부를 좀 잘할 걸’하는 후회가 마구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회사가 너무 바빠지니 내가 직접 외국인들에게 회사를 안내해줘야 했다. 서울 관광투어도 주말에 하게 되었다. 식은땀이 대놓고 나기 시작했다. 무역학과를 졸업했지만, 영어는 사실 관심이 도통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의 영어는 중학교 때 멈추었다. 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이 유독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영어단어 시험에서 100점 맞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80점을 맞았나? 반장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자격지 심였으려나. 시험을 보는 날에는 선생님이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안 좋아 보였다.


그 후로 영어 자신감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영어관심은 점차 국어 과목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교육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아빠의 제안으로 무역학과로 원서를 넣고야 말았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영어가 필요한 곳에 취업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교 때 갑자기 회화가 될 리 없었다. 교양영어도 점수가 형편이 없었다. 아마 교양필수가 아니었으면 안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토익점수를 겨우 따고 취업을 했는데 아뿔싸 수출수입을 하니 외국인을 만나고야 만 것이다. 취업하고 처음 외국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매일이 식은땀의 연속이었다. 회사에서는 포스트잇에 적은 영어가 나를 살리다시피 했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수출을 돕는 일이었다. 컨테이너가 공장으로 들어오면 확인했다. 밤늦게 남아서 컨테이너가 물건을 잘 싣고 떠나는지 확인하곤 했다. 수출을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은행에 그 서류를 제출했다. 그러면 수출이 완료되었다. 영어를 써야 하는 일은 한 달에 한두 번이었다. 종종 외국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힘든 것 빼고는 괜찮았다. 그렇게 나의 첫 직장은 순탄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나의 영어실력을 분명 아실 텐데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통역 담당으로 해외 출장을 가라고 하신다. '설마 나날이야? 나보고 통역을 하라고?' 누군가에게는 과연 기회였을까, 심장이 요동쳤다. 불운 시작이 된 것 같다. 남들이 보면 분명 행운일 텐데. 영어 잘하는 대학 동기들은 신이 날 텐데, 재앙이 시작되었다.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나를 통역 담당으로 보내다니 회사가 미친 거 아닐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진땀부터 났다.




첫 출장지는 튀니지였다. 제품 설치를 위해 기술자 차장님과 튀니지로 떠났다. 첫 비행기를 탔던 그 나라 튀니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면 다들 검은 피부 아닐까?' 유럽이 처음인 나는 사막의 나라를 생각했다. 우리보다 못살겠지?라는 편견에 편견을 가득 담고 있었다. 눈이 부신 나라였다. 유럽의 휴양지라고 했다. 호텔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여유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 일찍 조식을 먹기 위해 내려갔다. 1층 로비에는 따뜻한 커피와 크로와상 두 개를 두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얀 피부의 유럽 사람들처럼 보이는 정장 입은 사람들이었다. '아침에는 우아하게 이런 걸 즐기는구나!' 영어 고민은 없이 처음 본 광경의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현실은 바로 들이밀었다. 수출한 기계를 설치하는데 뭔가 잘 안 되는 눈치다. 외국인들은 잔뜩 모였는데 말이야. 그곳 사장님부터 기술자들이 열명은 넘게 나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엔지니어분은 영어를 전혀 못했다. 모든 시선이 곧바로 나에게 쏠린다. 뱉어야 했다. 영어로 뭐라고 설명을 해야만 했다. 쭈물쭈물 몇 단어로 설명을 시작했다. ‘영어회화를 진작 공부할걸’ 머리가 백지가 되어가는 걸까. 창피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다행히 라마단 기간이었다. 이른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지 않고 작업자들은 퇴근을 했다. 기계는 잠시 뒤로 하고, 바이어 사장님이 튀니지 주변을 구경시켜 주셨다. 영어로 참 자세히도 설명해 주셨다. 무슨 말인지 다 못 알아듣는데 말이다. 다음날 기계는 결국 잘 작동되었다. 회사에서는 기계가 잘 돌아가고 바이어가 돈을 보내주어 내 영어는 안녕했다. 엔지니어분께서도 무사히 마무리한 것에 좋아하셨다. 첫 번째 해외 출장은 엔지니어 차장님 덕분에 무탈하게 지나간 듯했다.


이후 회사는 점점 바빠졌다. 또다시 나에게 해외출장의 재앙이 들어왔다. 해외영업팀 B과장님은 너무 바빴다. 여러 해외출장으로 인해 해외전시회는 못 가신단다. 스케줄이 겹친 것이다. 해외전시회에 전무님이 가시는데 나에게 티켓이 주어졌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회사에 있던 터라 영어 뱉기 실력은 제자리다.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 영어공부가 간절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른 체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때였다. 다시 해외로 출장을 갔다. 해외전시회 장소는 독일이었다. '


유럽이라니 너무나 설렌다. 무섭다..' 현실은 고민한 그대로였다. 처절했다. 전무님께서도 영어를 하긴 했지만, 부스에서 우리 제품도 소개를 해야 했다. 외국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난 더듬더듬 설명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프다. 통역이라고 하기에 내 영어는 무식했으니 말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난 더듬더듬 영어로 제품 설명을 하고, 전시회 부스를 겨우 지켰다. 속으로 소리쳤다. ‘영어를 왜 멀리했냐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워졌다. 이후, 나는 회사를 떠나고 싶어졌다. 일 년은 채우라는 엄마의 간절한 외침을 뒤로하고 11개월 만에 사표를 내밀었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 체, 다른 회사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백수로만 있을 수는 없었고, 길이 보이지도 않았다. 두 번째 회사는 운 좋게 외국계 회사였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외국계로 이직한 거는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다. 수출입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 감각으로 뽑아주셨다. 영어를 쓸 일은 없었다. 무역팀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세 분이나 있으니 말이다. 영어를 잘하는 A국내파 대리님, B 유학파 과장님 그리고 C 일보다는 관리하는 부장님이 있으셨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 옆에 다시 존재하게 되었다. 점차 다시 쪼글아든다. 영어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다는 간절함은 배가 되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도 일 년 남짓 견디다 사표를 내밀었다.


27살! 영어가 대체 뭐길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었다. 방황이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번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모님께 손 내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회사에 다시 취업했다. 곧 그만두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게 한동안 방황을 했다. 결국 부모님께 사정을 설명했다. 당시 친구들은 대부분 어학연수를 다녀오던 시절이었다. 부모님께 짐을 지워주기 싫었다. 영어에 관심이 없던 것은 내 책임인데 ‘이제와 무슨 해외연수야’ 생각이 들었기에. 결국 엄마의 저지를 뒤로 하고, 아빠와 할머니의 지지로 영어를 공부하러 떠났다. 친구는 결혼을 한다는데 20대 후반 그렇게 영어로 자유를 얻고자 떠났다.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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