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일상은 단조롭다. 매주 월요일 저녁엔 드럼학원을 간다. 나머지 시간엔 누워있고, 밥을 해 먹고, 산책하고, 여행을 떠난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익숙한 영종도에 갈 때도 있지만, 시외버스나 기차를 타고 새로운 곳에 가기도 한다.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마음은 그다지 들뜨거나 설레지 않는다. 그냥 조금 궁금하다. 나는 그곳을 좋아할까?
어떤 시기를 마무리할 때면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뭐 이런 이유는 아니다. 그냥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퇴사 후 한 달간 드럼 학원을 쉬고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니, 선생님은 다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가서 뭐 하게? 여행가면 잃어버린 너를 만날 수 있냐?"
10대 땐 인도나 아이슬란드 정도쯤 가면 잃어버린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하는 건, 멀고도 긴 여행을 떠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자아를 잃어버린 적도 없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해외에 나의 자아가 있을 것 같진 않다(하지만 늘 약간의 가능성은 남겨 둬야 한다).
그래도 혼자, 때때로 타인과 함께 여행하며 나의 취향이나 호불호는 알아가게 되었다. 특히 내게 꼭 맞는 여행지 숙소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관광이 목적이라면 잠만 잘 수 있는 공간도 충분하지만 요즘 난 집이 아닌 공간에서 혼자 책을 읽고 커피와 술을 마시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공용 주방과 공용 화장실은 곤란하고 체크인도 가능한 비대면으로 하고 싶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호스트와 스몰토크를 해야 하면 곤란하다. 적절히 익명성을 지킬 수 있는 외지인이 되고 싶어 떠나온 것이다.
숙소엔 탁자와 등받이 있는 의자가 필요하다. 혼자 여행할 땐 음식을 포장해 끼니를 해결할 때가 종종 있어 간단한 식기류와 전자레인지, 커피포트가 있어야 한다. 성능 좋은 큼직한 냉장고, 커피잔과 술잔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커다란 창문 너머 바다가 보여야 한다. 바다가 가까울수록 좋다. 근처엔 편의점이나 하나로마트 정도만 있으면 된다. 가격은 평일 비수기 기준, 1박에 5만 원이 넘지 않으면 좋겠다.
이렇게 적고 보니 바라는 것도 많다, 싶지만 놀랍게도 이런 숙소는 꽤 많다. 참고로 나는 TV와 OTT 서비스, 욕조는 필요하지 않다. 조식 뷔페도 필요치 않고 유명 맛집이나 관광지와 거리가 좀 멀어도 괜찮다. 마주칠 때마다 고개 숙여 인사 해주고, 전화 한 통이면 객실까지 음식을 가져다주고, 매일 객실을 정비해 주는 서비스가 없어도 괜찮다. 분리수거와 쓰레기 정리는 내가 해도 된다.
이렇게 내게 필요한 공간과 시간에 대해 알게 되고 떠나는 일이 전보다 수월하다. 모두 떠돌며 배웠다. 5성급 호텔이라도 미니 냉장고는 음료를 시원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 숙소를 선택할 때 창문의 유무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는 것, 슈퍼마켓조차 없는 외진 곳은 생존을 골몰하느라 휴식이 쉽지 않다는 것, 이런 것들 말이다.
강원도 양양에 다녀왔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고, 가보지 않은 곳에 가보고 싶었다. 속초는 여러 번 갔지만 양양은 처음이다. 양양/속초행 버스는 속초로 향하는 길에 잠시 양양 버스터미널에 정차한다.
버스 출발 10분 전에 심드렁하게 버스에 올라탔다. 뒤이어 두 명의 승객이 버스에 오른다. 잔뜩 상기된 표정이다. 몸집의 절반만 한 배낭을 짐칸에 싣고, 여행에 대한 기대로 터질 듯 벅찬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다. 나도 해외에서 로컬버스를 탈 때 저런 표정이었을까? 아마 베테랑 여행자처럼 보이려고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을 것이다. 그들의 여행이 빛나길 바랐다.
버스는 두 시간 정도 달려 양양에 도착했다.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 헌팅 성지라는 이미지가 무색하게 겨울 양양은 고요했다. 이 시골 바다 마을이 여름이면 클럽을 방불케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거대 레지던스형 숙박업소와 편의점, 하와이나 동남아 콘셉트의 식당이 즐비했지만 비수기라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분명 섬이 아닌데 섬에 온 것 같았다. 거리와 산책로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3월의 양양은 한적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꼭 서울에서 살 필요는 없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면 어떤 일이 생길까. 매일 바다를 산책하면 난 어떤 사람이 될까.
양양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냥 생각만 했고 아직 답은 없다. 고백하자면 얼마 간 국내 여행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관광지 포토존, 전망대, 산책로, 안내판, 박물관, 뭐 이런 것들이 규격화된 듯 비슷비슷해서 얼마간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 동해는 서해, 남해와 다르다. 양양의 바다는 속초, 정동진, 강릉과 또 다르다.
양양은 우리 드럼 선생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나무처럼 한 공간에 뿌리내리고 지키는 사람이다. 양양을 떠나 서울에 왔고, 20년 간 떠나지 않고도 삶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양양에서의 시간은 아주 좋았고, 드럼 연습은 못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양양에 다녀왔다고 얘기해야겠다. 아주 아름답고 좋았다고. 아마 반가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