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건 넘는 이체가 예정된 날이었다. 몇 달 전 부터 재무 담당자와 이체일을 협의했고,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넘겼다. 그의 별명은 AI. 무뚝뚝하지만 일은 완벽히 처리하는 사람이다. 함께 일하는 동안 시스템 문제 같은 천재지변(딱 한 번) 외엔 예정대로 일을 처리했다.
이체가 예정된 날, 담당자는 컨디션 문제로 오전에 반차를 냈다. 일은 오후에 잘 처리해주겠지. 믿고 기다렸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는데,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알림이 없어 조바심이 났다. 내 요청 말고도 밀린 일이 많았다. 협력업체를 비롯해 곳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언제쯤 마무리될 수 있는지 물었다. 방금 시작해서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돈 언제 들어오냐는 전화, 문자, 메일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그가 일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래도 그를 믿었다. '담당자님이 지금 진행 하고 있습니다. 오늘 중엔 입금 될거에요.' 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자리로 가서 언제 쯤 마무리되냐 묻고 싶었지만 바쁠테니 참았다. 참고로 나보다 연차가 오래된 회사 선배라, 그걸 묻는 게 참 어려웠다.
얼마 후 그는 1그룹의 이체를 마쳤다. 아 됐다. 오늘 내로 남은 일도 해주겠지. 퇴근 가방을 꾸렸다. 퇴근 길에 수시로 사내 메신저를 새로고침하며 업무가 완료 되었는지 확인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던 중 메신저를 새로고침 했다. 30초 전 알림이 와있었다. 이체 시스템이 오후 8시까지만 사용 가능해서, 남은 이체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은 건은 월요일에 처리하겠다고.
하필 노트북을 회사에 놓고왔다. (제일 중요한) 1그룹의 이체는 된 게 맞는지 물었고, 아직 회사면 메일 본문을 써줄테니 남은 그룹에겐 양해 메일을 대신 좀 보내달라 요청했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 했다.
오늘 처리하기 어려우면 미리 말해주지. 그럼 내가 직접 대응할 수 있었을텐데. 왜 미리 준비 안하고, 왜 하필 오늘 반차인지. 동료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지만, 여러 사람에게 사과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그는 아끼는 동료다. 지금까지 꼼꼼히 일을 처리했고, 나의 잦은 실수와 미숙을 안고 가준 동료이자 선배다. 내가 더 신경써야 할 대상은 돈 언제 들어오냐고 몇 번 씩 전화해대는 외부인(대체로 예의범절 밥 말아먹음, 본인들은 수시로 기한 어김, 고객사도 아님)이 아니다.
일은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 내가 담당하는 사업만 하더라도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 재무담당자, cs담당자 등 수많은 사람이 협업하며 이루어진다. 이 일의 얼굴(연락처와 얼굴이 노출된 사람)은 나지만 결코 나 혼자 일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일이 잘 되었다면 우리 모두 때문일 것이다. 사업이 잘 되고, 내가 일잘러 소리를 들었다면 동료들 덕분일 것이다.
완벽한 한 페이지는 혼자 만들 수 없다. 문득 DAY6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라는 곡이 떠올랐다. 아무 걱정도 하지는 마..나에게 다 맡겨 봐..지금 이 순간이 다시 넘겨볼 수 있는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내 과실이 아닌 것에 대한 사과, 상황설명, 뭐 이런 건 내 담당이지.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해야지, 뭐.
팀원의 실수도 본인의 과실로 끌어 안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 팀원에겐 별 일 아니라고 어깨를 툭툭 쳐줄 수 있는 사람. 다음엔 어떻게 더 잘해보자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멋지게 팀원을 성장시키는 사람. 추구미는 맞다만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책 잡히기 싫고 남 탓 하고 싶고 인정 받고 싶고.
그래도 생각한다. 우리의 한 페이지를. 내가 미처 알 지 못하는 다른 팀원들의 노고를.
아직 부족해서 얼마 간 여기저기 하소연을 하겠지. 그래도 일터에서 우리는, 서로 어깨를 툭툭 쳐주며 괜찮다, 고맙다, 미안하다 말하며 일했으면 한다. 이게 오늘의 내가 하루를 견디며 정리할 수 있는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