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하이닉스: '신뢰 게임'을 읽고>
밤잠을 뒤척였다. 새벽 4시에 떠진 눈은 쉽사리 감기지 않았다. 우연히 책 한권을 잡았다. 그렇게 나의 새벽 2시간은 순삭을 당했다. 책을 다 읽고 정신을 차려보니 6시였다. 기분 나쁜 뒤척임이 어느새 상쾌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면부족으로 몸은 축 늘어졌을지 언정 머릿속은 쿨했기 때문이다.
책을 보며 깜짝 놀랐다. '크래프톤웨이" 이후 이런 책을 다시 만날 줄 몰랐다. 더구나 작가 중에 한분은 아는 분이 쓰신 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실제 기업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은 재직자만이, 그것도 CEO나 Top-team에 있는 고위임원만이 내막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분들의 글을 그 무엇보다 귀하고 생동감이 있다.
만년 2위였던 하이닉스. HBM이라는 상품 하나로 오랜 숙원이었던 1위의 자리에 올라가는 영화같은 스토리. 그 실체를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몇년 전, 기업문화팀에 있을 때 일이다. SKT가 하이닉스를 인수했던 사례를 연구해서 발표를 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우리 팀에서는 서울대 교수님 한분과 함께 히스토리를 파악하러 여러 임직원들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는 DBR에 잘 담겼다 (아래 링크 참고)
그 인터뷰를 봐도 알겠지만, SK그룹 내 누구라도 말렸던 사업이 '하이닉스 인수' 였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인수했던 그 기업 사실은, SK그룹 전체를 먹여 살리고 있다.
Anyway.
하이닉스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그리고 기업문화나 역량육성 프로그램과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오늘은 그 하나를 책에서 발췌해 풀어본다.
어떻게 하이닉스는 HBM을 개발하게 되었을까? 당시 HBM 개발을 이끌었던 임원의 인터뷰다. "2011년쯤 리스크가 매우 큰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는데 맡아서 할 의향이 있는지 문의가 들어왔어요. HBM1 개발 프로젝트였는데, 설계 인력 약 10여 명을 데리고 연구소로 가서 개발을 해보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이왕 시작한 바엔 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더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설계만이 아니라 소자와 제품 그리고 레이아웃 인력까지 50~60명의 디램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에 준하는 팀을 구성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제품화하는 데까지 책임을 지고 해 보겠다는 통 큰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회사가 어려운 상황임에도 이 제안을 받아 준 것이 참 신기했고, 그것이 HBM1 세계 최초 개발의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HBM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기술 성과에 고무되어 HBM2의 개발을 시작했지만, 하이닉스는 HBM의 기술적·사업적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HBM2 개발에서 경쟁사에 뒤졌고, 그 결과 사업 기회를 잃게 된다. 일반적으로 디램은 기술 전환에 보통 3년 이상 걸리며, 성능· 생산성 향상의 변화도 20~30퍼센트 정도인 것이 보통이나, HBM 의 버전 체인지는 기간이 2년 내로 짧으며 그때마다 파워와 스피드 등의 사양은 2배 정도로 크게 늘어나야 한다.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했음에도 충분한 성능을 뒷받침하는 완성도가 높은 새 제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HBM의 최초 개발은 하이닉스였으나, HBM2에서는 삼성은 성공하고 하이닉스는 개발 시점을 놓쳤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HBM은 여전히 시장 수요 확대가 불확실한 제품이었다. 그리하여 삼성은 시장 확대 가능성이 크지 않고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HBM의 추가 개발을 중단한다는 단호한 의 사결정을 내렸다. 하이닉스도 일등 기업이 내린 의사결정을 따라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HBM2 개발에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재무적 여유도 많지 않았으며, HBM의 시장 확대 가능성이 여전히 약했다. 더구나 일등 기업조차 개발 중단 의사결정을 내린 상황을 고려할 때, 하이닉스는 누가 봐도 개발 중단이라는 결정을 하는 것이 당연했을지 모른다.
일등 회사인 삼성이 HBM 사업을 축소할 때 HBM 사업에 대한 하이닉스의 고민은 더욱 깊어 갔다. 그 이유가 기술 개발이 안 되거나 고객과 사업을 못 해서도 아니었다. 선두 회사가 사업을 축소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니냐.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제품을 하이닉스만 붙잡고 있다가 시간과 돈만 날리는 거 아 니냐. 정말 HBM 시장이 열리기는 하는 거냐? 등등 내부에서도 HBM 사업에 대해 다양한 이견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하이닉스의 결정을 달랐다. 여기서부터 기업문화가 힘을 발휘한다. 하이닉스는 HBM 개발 지속 여부에 관한 의사결정을 집단지성에 맡겼다. 실무진의 많은 논의와 스피크업이 있었고, Top Team 에서도 많은 논의가 이어진 끝에 최종 결정은 놀랍게도 "HBM 사업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여 사업을 더 강화하자는 결정까지 내린다. 이것은 당시 하이닉스 문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일등 기업인 삼성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기존의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놀라운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하이닉스만의 소통의 힘인 신뢰 게임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하게 된다.
여기까지다. 책의 내용을 살짝 각색했다. 기업문화의 힘으로 언급된 스피크업, 집단지성, 원팀으로 움직인 Top-team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기회가 되면 그 내용도 추가로 공유해 보고 싶다.
하이닉스의 성공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흥미롭게 지켜 보고 싶다.
[참고] "앞으로의 10년은 과거의 10년과 다르다" 도전 정신 - 기업가정신이 만든 성공의 역사 (2021년 10월 DBR Case Study)
https://dbr.donga.com/article/view/1201/article_no/1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