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 특유의 문체, 글 읽기에서 만나는 의외의 복병
[008] 교과별로 나타나는 사회적 문체
격물의 기본 의미는 구체적 사물에 나아가 그 극한에까지 사물의 이치인 리(理)를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치지란 나의 지식을 극한까지 연마하고 확장하여 앎의 내용에 미진한 바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는 사람의 마음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 격물을 통하여 마음속에 본디 있던 앎을 밝혀내면 치지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유가 철학의 전통적인 격물론이다.(중략)
당초 퇴계는 격물을 추구한 결과의 상태, 즉 물리가 전부 파악된 경지를 뜻하는 물격(物格)을 ‘물에 격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물을 인식 대상으로 보고 인식 주체인 사람의 마음이 대상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 하지만 만년에는 물격에 대한 해석을 ‘물이 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즉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고자 하면 사물에 내재한 리가 마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일방적으로 사물에 내재한 리에 다가가서 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고자 하면 사물의 리가 사람의 마음에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이를 퇴계는 리가 마음에 직접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라 이른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본 까닭은 만약 리가 리의 자발성만으로 마음에 이른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마치 리가 물리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 과정에서 인식 대상인 리의 능동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리자도(理自到)’이다.
[이것만은 …]
*궁극의 한계. 사물이 진행하여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단계나 지점을 이른다. ( )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힘써 배우고 닦음. ( )
*아직 다하지 못하다. ( )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실재적 사물. 또는 느낄 수 없어도 그 존재를 사유할 수 있는 일체의 것.
( )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 지각, 기억, 상상, 개념, 판단, 추리를 포함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용어로 쓴다. ( )
*정신 또는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의하여 표상이 된 것. 나무나 돌과 같은 실재적 대상, 원(圓)이나 각(角)과 같은 비실재적(非實在的) 대상, 진리나 가치와 같은 타당적(妥當的) 대상의 세 가지가 있다.
( )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 실재하는 객관에 대립하는, 의식하는 주관. ( )
*물질의 원리에 기초한 것. ( )
*스스로 내켜서 움직이거나 작용함. ( )
*옳지 않은 일이나 잘못된 일들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서 주의하게 하다. ( )
사물에 나아가 … 미진한 바가 없는 …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 … 대상에 이른다 … 마음에 이른다
철수 쌤은 대학 입학을 위해 총 17개 과목의 시험을 봤다고 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2학년이 되면 자신의 진로를 고려하여 교과를 선택해 이수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문과생은 과학탐구 시험을 보지 않고, 이과생은 사회탐구 시험을 보지 않는다. 그뿐이랴? 사회 교과든, 과학 교과든 최대 2개 과목만 선택해서 시험을 본다. 그러다 보니 문과생들은 사회 교과 전체를, 이과생은 과학 교과 전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 학점제가 시행되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국어 성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국어 선생님들은 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 이유는 단지 해당 교과에서 배우는 지식 때문만은 아니다.
영문 ‘I have a son.’을 직역하면 ‘나는 아들을 가지고 있다.’이고, 의역하면 ‘나에게 아들이 있다.’이다. 직역과 달리 의역은 자연스럽게 느껴져 그 뜻이 쉽게 이해된다. 이러한 직역과 의역의 효과가 옛글과 관련한 글에도 있다.
지문에서 ‘사물에 나아가’는 대학(大學, 유교 경전의 하나)에 있는 ‘즉물(卽物)’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卽’에 ‘가깝다’, ‘나아가다’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에 접(근)해’,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사물을 살펴’ 등으로 의역한 것과 비교해 보자. 의역이 좀더 쉽게 이해되지 않는가?
‘대상/마음에 이르다’도 마찬가지이다. ‘이르다’는 ‘到’를 직역한 것으로, ‘목적지에 이르다’, ‘자정에 이르러서야’라는 용례처럼 ‘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의 뜻에 익숙한 우리에게 ‘대상/마음에 이르다’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만약 그것을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다’, ‘마음으로 완전히 파악되다’로 의역했다면 우리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문의 직역이 주는 어색함은 이중 부정에서도 있다. ‘미진한(다함이 없는) 바가 없는’,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와 같이 한문에 이중 부정이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그대로 직역한 경우가 많다.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을 뜻하므로, 이것들을 ‘다하는(여기서 ‘다하다’는 ‘계속하던 일을 끝내어 마치다’의 뜻으로, ‘盡’을 직역한 것이다)’, ‘앎이 있어서’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어색함을 많이 느끼게 하는 교과가 철학(윤리) 교과이다. 한문이나 외국어로 기록된 지식들을 가르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수 쌤은 몇 년 전부터 교육청 전국연합학력평가 출제 때 다른 교과의 문제를 윤문(문제에 쓰인 문장을 논리적‧어법적으로 자연스럽고 올바르게 다듬어 주는 것)해 오고 있다. 그런데 수정 의견을 제시하면 그 교과 선생님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분들의 말씀은 이랬다.
“우리 교과에서는 이 문장(어휘)을 수십 년간 사용해 왔어요. 이렇게 쓰고 우리들은 철수 쌤이 말씀하는 의미대로 받아들여요. 만약 이것을 바꾸게 되면 우리 교과에서는 도리어 어색하게 느끼고 뭔가 다른 뜻인가 하며 혼란스러워 해요.”
철수 쌤은 그 말을 듣고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실 교과에 따라 말하는 투가 다르고, 같은 어휘나 문장도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이를 언어학에서는 ‘사회적 문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교과 입장에서는 어색한 말투라도 학생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에는 철수 쌤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부작용도 크다는 것을 교과 선생님들이 알아야 한다. 그 교과를 공부하려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아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이라면? 아마 그 학생들은 어색한 말투 때문에 그 교과를 어려워 하고 더욱 싫어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생들이 그 교과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학생들 잘못이 아니라 어색한 말투를 고집하는 교과 선생님들 잘못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국어 시험에서는 어떨까? 국어 출제 선생님들은 특정 교과를 배우지 않은 학생들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투를 최대한 윤문한다. 그렇다고 교과의 말투를 무한정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말투에는 교과 특유의 개념을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나아가’, ‘미진한 바가 없는’, ‘앎이 있지 않음이 없어서’, ‘대상/마음에 이른다’ 등은 바꾸다 바꾸다 바꿀 수 없어 사용한 철학(윤리) 교과의 말투이다. 따라서 이 정도의 말투는 철학(윤리) 교과를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도 알아들어야 한다. 즉 지문을 잘 읽고 싶으면 교과에서 배우는 지식뿐만 아니라, 교과 특유의 말투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읽어야 한다고 한다. 지식을 골고루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말투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물에 격한’ 것… 하지만 ‘물이 격한’ 것… 마음이 … 리에 다가가… 아니라 … 리가 … 마음에 다가온다… 리가 마음에 직접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라 이른다
국어 능력 중에 하나가 대조 능력이라 했다. ‘A 하지만 B’, ‘A이/가 아니라 B’라는 문장 구조의 글을 읽을 때 필요한 국어 능력이 대조 능력이다. 즉 A와 B를 반대말로 생각하며 읽어 주면 좋다는 것이다. 이 지문 내용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내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이해하는 국어 능력을 알고 있다가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법 시간에 ‘철수 쌤은 지영이에게 선물을 주었다.’를 배울 때, ‘철수 쌤’은 주어, ‘지영이에게’는 부사어, ‘선물을’을 목적어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 문장을 논리적‧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철수 쌤’은 ‘주다’라는 행위를 하는 주체, ‘지영’과 ‘선물’은 ‘주다’라는 행위를 당하는 객체이다. 즉 주어는 주체이고, 부사어나 목적어는 객체가 된다. (이것을 알아두면 ‘나는 할머니를 뵈었다.’, ‘나는 할머니께 인사 드렸다.’를 왜 ‘객체 높임’이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문의 ‘물에 격하다’에서 ‘물에’가 부사어이므로, ‘물’은 객체가 된다. 그리고 ‘물이 격하다’에서 ‘물이’는 주어이므로, ‘물’은 주체가 된다.
이때 이용해야 할 또 다른 국어 능력이 이원론(二元論)이다. 이원론은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원리나 원인으로써 사물을 설명하려는 태도 또는 그런 사고방식이다. 예컨대, ‘안[內]’과 ‘밖[外]’, ‘어둠[陰]’과 ‘밝음[陽]’, ‘형식’과 ‘내용’, ‘이성’과 ‘감성’ 등이 이원론적 개념들이다. 이 지문을 읽을 때 이용한 주체와 객체도 대표적인 이원론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주체와 객체는 대립되므로, ㄱ에서 ‘물이 객체가 된다’는 것과 ‘물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반대의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ㄴ, ㄷ에서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리, 대상’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마음’을 주체로, ‘리, 대상’을 객체로 보는 경우와 ‘리, 대상’을 주체로, ‘마음’을 객체로 보는 경우는 상반되는 의미인 것이다. ㄹ에서 ‘마음에 직접’은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라’와 반대말로 생각하고, ‘마음이 탐구하는 것에 따르지 않고(상관없이)’로 바꿔 이해하면 그 뜻이 좀더 쉽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철수 쌤은 철학(윤리) 교사가 아니다 보니 위에서 말한 ㄱ~ㄹ의 말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론적 개념과 대조에 관한 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대강의 의미만을 이해할 뿐이다. 물론 그래도 풀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된다. 그것이 바로 국어 영역이다.
리의 자발성… 리가 물리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 잘못 이해… 또한 … 리의 능동성… 마음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 경계
앞에서 다른 어휘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같은 내용임을 아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국어 능력이라 했다. 이 지문에 ‘리의 자발성’과 ‘리의 능동성’이라는 말이 있다. ‘자발’은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자기 스스로 나아가 행함을 뜻하고, ‘능동’은 스스로 내켜서 움직이거나 작용함을 뜻하므로, 둘이 비슷한 말임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A 식으로 잘못 이해하다’와 ‘A를 경계하다’도 비슷한 의미임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경계’는 옳지 않은 일이나 잘못된 일들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서 주의하는 것을 말하므로, 그 대상은 ‘잘못 이해’한 대상처럼 옳지 않은 것이다. 지문에서 ‘리가 물리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와 ‘리의 능동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경우라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리적’이라는 말의 쓰임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리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려면 ‘정신적’과 함께 이원론으로 생각해야 한다. 물리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과 달리 질량, 위치, 부피, 속도 등을 갖는 것으로서, 오감으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물리적 운동’은 감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운동을 말한다. 이 정도는 정상적인 고등학생이라면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은 … ]의 정답
극한(極限), 연마(鍊磨), 미진(未盡), 인식(認識), 물(物), 대상(對象), 주체(主體), 물리적(物理的), 능동(能動), 경계(警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