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211002 ‘세 가지 색 : 레드'(1994) 발제문
1.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대단한 건 자유, 평등, 박애의 양면성에 질문을 던지며 교훈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블루, 화이트, 레드의 색을 예상치 못한 상징으로 적절하게 녹여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색 : 블루(1993)’는 생의 고통 안에서 자유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회의적으로 제시한다. 이 때 푸른색은 줄리가 해방되기 보다는 얽매이고 구속되는 색이다. ‘세 가지 색 : 화이트(1994)’는 남을 끌어내리지 않는 평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가장 이상적인 평등의 상태를 흰색에 비유한다. 물론 이 흰색은 허상과 가깝다.
삼부작 중 마지막 이야기인 ‘세 가지 색 : 레드(1994)’는 이해와 사랑에 수반되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블루와 화이트가 자유, 평등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면, 레드는 어떤 관계는 고통을 뚫고 이해 너머로 나아가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약간의 희망을 제시한다. 그래서 레드에서의 붉은색은 특수한 상징이 된다기보다는 모든 인물의 일상 속에 드문드문 녹아있다. 타자를 향한 박애가 대상의 작고 사소한 일부분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2.
‘세 가지 색 : 레드(1994)’는 여러 인물들이 관계 맺는 양상을 보여준다. 발렌틴과 판사, 오귀스트와 그의 연인, 발렌틴과 마크, 미셸의 관계는 모두 대상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대상을 더 알려고 하는 것, 대화를 시작하는 것조차 박애가 뒷받침되는 행위다. 그 과정에서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받는 상처는 필연적이다. 판사의 도청 행위, 기상정보 안내원의 바람, 아버지가 계부라는 사실, 연인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것 등.
하지만 발렌틴은 결국 판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판사가 도청을 해왔던 건 자신을 떠난 옛 연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자신의 상처를 덮어보고자 함이다. 판사를 신고하겠다던 발렌틴은 그를 가엾게 여기게 된다. 도청 행위는 판사에게 오히려 세상에 대한 더한 불신을 심어주었지만, 솔직하고 선한 발렌틴을 만남으로써 판사는 다시 마음을 열게 된다.
3.
오귀스트가 겪는 일은 판사의 과거와 동일하다. 법관이 되었는데 연인이 바람을 피우고, 사고로 사망한 것까지. 냉혈한 같은 이 판사조차 한 때 오귀스트와 같은 선한 청년이었음을 암시하려는 듯 하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도,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다.
4.
발렌틴의 포스터와 마지막 TV 화면 속 발렌틴의 얼굴은 동일시된다. 발렌틴이 처음 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는 슬프게, 겁 먹은 표정을 지으라고 지시한다. 발렌틴이 보고 있는 붉은색 바탕은 타자를 향한 이해와 연민을 상징하며,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이 슬프고 고통스러움을 암시한다. 구명보트에서 내린 발렌틴은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을 애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Q. 자유는 속박이며, 평등은 허상이고, 박애는 고통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게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세 가지 색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Q. 발렌틴은 판사를 이해하게 되지만 마크, 미셸, 사진사 등과의 관계에서는 고통받는 인물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결국 전하고자 한 건 관계의 허무일까?
스터디 후 생각 정리
‘박애’는 ‘타인을 향한 편견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보다는 동지애, 우애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이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더 말이 되는 것 같다. ‘연결’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 다른 친구의 발제문이 인상적이었다. 전화선을 통해 판사가 타인과 연결되듯, 그리고 발렌틴이 우연히 오귀스트와 자꾸 마주치듯. 결국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인연이라는 거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두고 ‘우연이 필연이 되는 이야기’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더랬다. 자꾸 마주치는 발렌틴과 오귀스트가 결국에는 페리 사고 생존자로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니까. 페리 사고에서 발렌틴이 살아남은 것에 대해, 종교적인 의미로 선한 자에게 초자연적인 존재가 내리는 자비나 은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견도 흥미로웠다. 영화 속 발렌틴은 무관심한 타인들을 이어주는 희망적인 존재로 기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