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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Bloomer Mar 21. 2020

비트코인 팔아 벤츠와 아파트 장만

블랙스완 - 나심 니콜라스 탈렙

 2012년 9월 기술이 관심이 많았던 나는 ‘비트코인’이라는 가상화폐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다. 당시는 1비트 코인이 10달러 남짓하던 때였다. 블록체인이 기술적으로 매우 흥미로웠고 비트코인 개념도 미래에 화폐 역할을 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래서 알바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비트코인을 사는데 쏟아부었다. 134개의 비트코인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후에는 학업과 취업활동에 바빠 잊어버리고 있었다.  


 2013년 비트코인이 잠깐 급등했다가 2017년 비트코인의 가격은 1만 달러를 넘어가고 있었다. 투기적 요인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비트코인이 더 오를 것을 기대하고 더 묵혀두기로 결심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거품이 빠지고 비트코인의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요동을 거친 현재(2020년 3월) 1비트코인의 가격은 6천 달러 대에 그치고 있다. 목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더 이상 마음 졸이며 살고 싶지 않아, 얼마 전 비트코인을 모두 처분했다. 내 수중에는 10억이 약간 넘는 돈이 들어왔다.  


 나는 이 돈으로 예전부터 사고 싶었던 벤츠를 구매했다. 그리고 남는 돈으로 서울에 작은 집을 구매했다. 그러고 나니 비트코인으로 번 돈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행복했다. 비트코인 그래프처럼 요동치던 내 마음이 이제는 안정적인 가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돈을 투자해 8년 만에 몇 백배의 수익을 얻었으니 성공한 투자라 할 수 있겠지. 이렇게 성공하고 나니 다시 이 손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종목이 유망할까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다. 내 투자 실력이면 5년 뒤에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일어나 보니 모두 꿈이었다.(아시발꿈). 만약 로또가 당첨되면 무엇을 살까 하는 것처럼 허황된 상상력을 바탕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어내 보았다. 정말 만약 내가 2012년 무렵 비트코인을 100개 정도 사서 2017년 폭등하던 무렵 팔았다면 저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 그 주식을 샀어야 하는데’, ‘그때 그 전공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 사람을 잡았어야 했는데(혹은 그 사람과 헤어졌어야 했는데)’ 따위의 후회를 하고는 한다. 만약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지 너무나 손쉽게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매주 로또만 사도…)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애쓴다. 하지만 예측이 가능하다면 모두가 큰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예측한다는 착각만 가진채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모르는 방법을 마치 정답인양 믿으며 살고 있다. 비트코인이 이렇게 가치가 폭등할지 누가 알았을까. 미국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당선될 줄 당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예측하지 못했다. 21세기에 전 세계적인 유행병이 창궐할 줄 누가 예측했을까. 우리가 가진 수학적 도구와 고성능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해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책 제목이 ‘블랙 스완’이다. 왜 블랙스완인가? 1600년대, 서구인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백조는 무조건 흰색이었다. 백조같이 생겼는데 털이 흰색이 아닌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검은 백조 한 마리가 발견되자 몇 천년 동안 이어오던 상식이 깨지게 된다. 단 하나의 사건으로 과거의 경험이 심각한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을 두고 ‘블랙 스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관찰과 경험에 근거한 학습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마리가 넘는 흰 백조를 보고 또 보면서 견고히 다져진 일반론이 검은 백조 한 마리 앞에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못생기기 짝이 없었다는) 검은 백조 딱 한 마리로 충분했다.(p.21) 


블랙스완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블랙스완은 ‘극단값’이다. 극단값이라는 말은 정규분포에서 맨 끝부분, 즉 발생 확률이 매우 매우 낮아서 무시해도 될 사건을 말한다. 둘째, 블랙스완은 극심한 충격을 안겨 준다. 셋째, 블랙 스완이 나타나고 나면, 인간은 적절한 설명을 시도하여 이 검은 백조를 설명과 예견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1914년 세계대전 발발 전날에 세계정세를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다음에 일어날 일은 거의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7년 주식시장의 붕괴도 바로 전날 예측한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블랙 먼데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발생하고 난 후, 사람들은 갖가지 분석과 설명들을 통해 그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이제는 과거를 잘 파악했기 때문에 더 이상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말 그대로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검은 백조 원리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많은 경우, 검은 백조 현상은 예상 밖의 일이기 때문에 발생하며 또 그래서 그 효과가 증폭되는 것임에 유의하자.(p.25) 


알고 있는 것에서는 어떤 위험도 나오지 않는다. 예측에 오류가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예측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멋진 유느님...


 제목의 어그로를 보고 왔다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발끈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말이야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어. 나는 이런 것도 알고 저런 것도 알고. 미래를 누구보다 잘 예측한단 말이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하는 예측이 반드시 틀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예측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의 예측에 맹목적이 되어버리면 실패해서 맞이할 극심한 충격에 대비하지 못한다.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 인지해도 전략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지 알아보자. 더 나아가 미래를 예측한다고 착각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뭘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규모 불변적인 영역과 규모 가변적 영역이다.  

규모 불변적 영역은 선형적이고 평균값이 큰 의미를 가지고 정규분포 곡선을 따른다. 그리고 짧은 시간의 관찰로 상황 파악이 가능하고 발전이 점진적이다. 그 예로는 키, 몸무게, 직장인의 수입, 자동차 사고, 아이큐 등이 있다. 

규모 가변적 영역은 비선형적이고 평균값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고 지수 곡선을 따른다. 5000만 원 연봉의 직장인이 999명 모인 곳에 빌 게이츠가 끼어들어 그 1000명의 수입 평균을 낸다고 하면, 그 평균값은 별 의미 없지 않겠는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가 얽혀있어 상황 파악이 어렵고(거의 불가능하고) 발전이 비약적이다. 예로는 부, 구글에서의 검색 횟수, 도시의 인구수, 작가당 책 판매 부수 등이 있다.  


 인간은 규모 불변적인 영역, 즉 선형적이고 점진적인 영역에서 예측을 매우 잘한다. 인간의 뇌는 패턴 인식과 시뮬레이션 능력이 탁월하다고 한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대부분 대수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데이터가 많을수록 더 정확한 값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규모 가변적인 영역이 훨씬 많아졌다. 자본주의 세계는 디폴트가 규모 가변적 세상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과거의 데이터를 가지고 선형적인 분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데, 영역 자체가 선형적 해석을 불허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예측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특히 인간은 ‘확인 편향의 오류’와 ‘이야기 짓기의 오류’에 빠져 스스로 정보를 왜곡시킨다. 확인 편향의 오류란, 본인이 믿고 싶은 정보만을 찾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걸러내는 뇌의 필터링 작용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담을 용량이 없기 때문에 이 필터링 작용이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규모 가변적 영역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해석한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분석이 나오게 된다.  

이야기 짓기 오류 또한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에게는 이야기 형식이 기억하고 납득하기 용이하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뇌는 사물을 해석 없이 원형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름의 해석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정보가 무작위적일수록 차원이 더 커지며, 따라서 요약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거꾸로, 요약할수록 더 질서 정연해지고 무작위성을 감소한다. 말하자면, 단순화를 강요하는 바로 그 조건이 세계를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p.140) 


이야기 짓기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특성이 복잡한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제단 하여 극단값이 출현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 역사는 극단적인 역사를 통해 발전해온 부분이 크다. 세계 대전, 대공황, 테러 등. 우리는 보편적인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오히려 극단적인 사건들의 원리를 연구해야 한다.  


‘정상적인 것,’ 특히 ‘정규분포’를 나타내는 종모양의 곡선을 전제로 추론을 전개하는 대부분의 사회 연구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정규분포란 큰 편차를 무시하거나 다룰 수 없는데도 마치 우리가 불확실성을 길들이고 있다는 확신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p.33) 



 사람의 오류뿐 아니라 정보 자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어렵게 되기도 한다. 이를 ‘말 없는 증거의 문제’, ‘반복 기댓값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살아난 성도의 간증을 듣는다면 ‘역시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고도 죽은 사람은 어디 있는가? 그 사람들은 죽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남은 소수의 사건만 보게 되기 때문에 진실을 알기 어렵다. 이를 ‘말 없는 증거의 문제’라고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지금 석기시대로 와서 족장에게 미래의 발명품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유용한 발명품이 뭐가 있을까. 그래, 바퀴를 발명하면 짐을 옮길 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바퀴의 발명을 예측했다면 우리는 이미 바퀴의 모양을 알고 있을 것이고 만드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바퀴를 발명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블랙 스완을 예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예견이 가능할 정도로 미래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미래에 속한 요소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발견이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상태라는 풀이다.(p.291) 


이를 ‘반복 기댓값의 법칙’이라 한다. 우리는 늘 최종적인 지식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비웃는 과거의 사회에서도 같은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또 한 가지, 푸앙카레의 ‘3체 문제’가 있다. 당구대 위의 당구공의 위치를 정확하게(나노미터보다 더 작은 단위까지 매우 정밀하게) 예측하려면 매우 다양한 정보가 필요하다. 당구공의 질량과 당구대 표면의 마찰력, 때리는 충격의 강도. 물리학에서는 이 정도로 근사화해서 계산한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당구대 주변에 서 있는 사람 때문에 발생하는 인력까지 계산해야 하고, 심지어 100억 광년 떨어진 우주 저 끝의 전자 한 개도 당구공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나비효과) 이것도 계산에 넣어야 할지 모른다.  


요컨대 포켓볼 당구대 위에서 일어나는 당구공 하나의 운동을 예측하는 데에도 우주 전체의 역학에 대한 지식을 원자 하나하나의 수준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p.300) 


 물리적 세계에서 모든 조건을 알았다고 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예측할 수 있다면 정말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측은 신의 영역인 것이다. 결론은, 우리는 결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측을 하고 살아간다. 예측을 안 할 수는 없다. 거듭 말하지만, 예측을 하되 거기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투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때까지 30년 버스를 타며 한 번도 사고가 나지 않아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 예측이 틀려서 내일 당장 심각한 버스 사고가 나면 어쩔 텐가. 통계를 보면 버스 사고는 확률은 낮지만 늘 일어나고 있다. 단지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  

함께 동업하는 20년 지기 친구가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당장 내일 친구가 사업 자금을 모조리 들고 도망가면 어쩔 텐가. 주변에서 친구에게 뒤통수 맞은 얘기는 수도 없이 듣는다. 단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일 뿐.  

나는 이제부터 버스를 타지 말고 친구랑 사업도 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 누구도 확률을 계산할 수 없다. 확률에 매달리고 이 사건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예측하기보다, 결과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충격을 완화할 것인가 대비하는 것이 더 안전한 전략이다.  


어떤 사건의 (알 수 없는) 확률을 계산하는 것보다는 (알아낼 수 있는) 그 결과에 집중함으로써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불확실성에 대한 중심적인 개념이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완화하는 것뿐이다.(p.347) 


 이 책을 읽고 확인 편향이니 가우스 곡선이니 프랙털이니 하는 개념을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의 예측이 틀릴 수 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던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만 인지해도 매우 훌륭한 교훈을 배운 것이다. '인식론적 교만’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지식의 한계에 대하여 교만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지식이 늘어남과 동시에 혼동과 무지, 자만이 늘어나는 것이다. 인식론적 교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게 만들며 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이런 교만을 버리고 ‘인식론적 겸손’을 가질 때야 비로소 세상의 위험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연하지만, 나는 위험 공포증을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눈을 감은 채 길을 건너지는 말라는 것이다.(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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