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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Dec 04. 2021

해녀를 만나고, 해녀를 읽을 수가 있어서

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2

한참 도내 어촌계를 돌며 해녀들의 얘기를 수집하던 때였다. 2007년 2월 기획팀이 남긴 메모에는 '잠녀는 나이를 먹고, 바다는 생명력을 잃고'라고 적혀있다. 그 사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달라진 것은 '제주해녀'에 대한 사회적 잣대다. 여전히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지닌 정체성을 지켜야한다는데 공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제주를 이야기하면서 제주해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제민일보 2006년

△'생존' '생업'에서 출발

2005년 6월 2일 잠녀기획(당시는 잠녀라는 단어에 무게를 뒀었다. 바뀌게 된 사정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설명하기로 한다)의 처음은 '어머니'로 시작됐다. 물질을 하는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통용된 '해녀'가 아닌 '잠녀'로 통일해 부른다고 의미 부여를 했다. 뭍으로 찾아갈 수 있는 가장 끝인 '강원 고성군 거진리'를 시작점을 삼은 것 역시 비슷한 의미였다. 왜 물질을 했는지, 왜 뭍으로 향했는지, 그들에게 '생존'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물었다.     

2006년에는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화두로 던졌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생업을 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부터 해녀 공동체의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접근이 이뤄졌다. '전시성' 문화유산 지정의 함정과 제주사 정립과 연계한 해녀의 사회적 지위 재고 주문도 나왔다.     

2006년 7월 시작된 '발로 딛는 잠녀들의 삶'은 도내 100여개 어촌계를 중심으로 지역 잠녀들의 현황과 작업환경, 변화상 등을 살피는 등 지역별 비교분석을 위한 여정이었다. '4·3은 말한다'로 우리나라 데이터 저널리즘의 첫 페이지를 썼던 제주 언론 DNA가 해녀에도 고스란히 이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고령으로 깊은 바다에 들지 못하는 대신 관광객을 상대로 새로운 소득을 창출한 '안덕면 사계리'에서 출발한 걸음은 돌고 돌아 2008년 12월 구좌읍 월정리에서 끝났다.

그 과정에서 해안도로가 나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 하나 둘 관광시설이 들어서면서, 하수종말처리장이나 화력발전소, 양식장 같은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피하기 힘든 기후변화나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하나 둘 바다를 떠나는 해녀들을 만났다.     

제민일보


△기억을 기록으로

'톳짐을 못질 정도면 알아서 포기했다'(북촌 해녀 인터뷰 중)는 말처럼 해녀들이 스스로 바다를 떠나는 사정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라는 큰 목표 외에 그들의 기억을 하나라도 더 기록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졌다.

2009년 3부 '잠녀를 만나다'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촌계 작업도 쉽지 않았지만 산업화·도시화 등을 거치며 홀대를 받고 편견에 시달렸던 트라우마는 해녀들이 기억을 더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1950년대 이후 독도 물질을 했던 잠녀들을 찾아내 '실효지배적 의의'를 부여하고 일본과 중국까지 건너가 바다에 몸을 던지면서도 제주에서의 기억을 붙들었던 잠녀들을 찾아 기록한 것은 두고두고 잊디 못할 일이다.          

이후 제4부 '제주 잠녀, 지키다'를 통해 제주해녀박물관과 해녀와 관련한 연구서와 연구자 등의 흔적을 훑었고, 5부 '잠녀에서 미래를 읽다'를 통해 콘텐츠 등 문화유산으로서 활용 가치를 점검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제주해녀문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 대상 신청종목으로 채택된 것에 맞춰 유산화 작업의 토대가 될 '제주해녀목록'(제6부)도 작성했다.

1600년대 '잠녀'라 칭했던 자료를 찾아내는 등 일련의 작업은 현장에서 진행됐다.

변변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고문서를 뒤지거나 관련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채록했다. "해녀 하나가 목숨을 잃으면 박물관 하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상황을 세상에 들춰냈다.지역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다고 애써 의미 부여를 했지만 솔직히 안팎으로 쉽지 않았다. 많이 다쳤고 잃었으며 단단해졌다. 마치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바다에 평생을 의지하며 버티고 산다는 어느 노해녀의 삶처럼.  


 

제민일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라

어찌됐든 기획이 시작된 지 꼬박 1년 만인 2006년 6월 '제주해녀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2009년 11월 '해녀문화 보존 및 지원 조례'가 제정됐고, 2011년에는 '제주해녀문화 세계화 5개년 계획'이 수립됐다. 해녀문화보존 및 전승위원회의 탄생도 지켜봤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가 '대한민국무형문화유산국가목록'에 '해녀'를 포함시키고 유네스코 본부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까지 일련의 흐름 앞에 해녀공동체를 중심으로 제주가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제주 해녀가 물질 기술 외에도 민속지식을 통해 이어져온 '살아있는 문화유산(Living Heritage)'이자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성이라는 제주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사회적 함의를 이끌었다.


다만 여기까지. 인터넷을 살짝 털어보면 이런 과정은 저 멀리 뒷전에 가있다. 내 일이 아니었던 것 처럼, 아니 ‘너’는 없었던 것처럼.

10여년 기록작업을 했지만 논문이나 저서로 반듯하게 들이밀 것도 없고(취재해 기사화한 내용이나 의견, 주장을 마치 자신들의 것인 것처럼 쓰고도 인용 표시같은 것을 가볍게 무시한 경우를 많이 봤다), academic degree를 앞세워 선 밖으로 밀어내는 일도 허다했다.          

그래도 묵묵히 ‘앞’을 봤다. 갈 길은 많고 또 멀었다. 해녀불턱아카데미를 제안하고…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큰 일 ‘하나가 있었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것은 주변에도 있었다. ‘뭐가됐든 할 수 있는 건 해야겠다’고 에너지를 죄다 꺼내 쏟았다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이번 불턱 아카데미는 정말 행복했다. 내민 것의 두세배가 돌아온다. 아이들의 눈빛만이 아니라 같이 수업을 들은 선생님에게서도 ‘내일’을 봤다.

“주제수업을 하려다 막막해서 못했었다. 좋은 얘기를 들었다” “수업과 연계한 자료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줬으면 좋겠다” “내년에도 우리 학교에 꼭 와서 아이들을 만나 주실거죠”

네네 물론이죠.(정말 하고 싶어요)

대답에 잔뜩 힘을 줬지만 가슴 한 켠에서는 언제나처럼 칼바람이 분다.

누군가에게 이런 내 의지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을 하고 나서 늘 아프다.




어쩌다보니 짧은 기간 10회차 해녀불턱아카데미를 진행했다. 해녀불턱아카데미를 마치면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잠시를 제외하고 이내 끙끙 몸살을 앓았다.

‘하고 싶은 것’을 애써 외면하며 힘들고 아픈 상황에 집중했다. ‘그래 여기까지도 잘 했다. 잘 한거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프로 격투기 선수의 주먹 같은 후회가 사정없이 휘몰아친다.

간신히 균형을 맞췄던 것들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왜…아직 그 답을 찾고 있다.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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