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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정리하며 어정거리는 맛...에 취하다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수연산방, 이태준, 그리고 무서록

by 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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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빼어나고 사유가 그윽하여

펼치는 곳마다

머물러보고 싶은 산문집‘


박연준 시인의 <듣는 사람>을 읽다가 눈에 익은 이름에 멈췄다. ‘조선의 모파상(벌써 떨림)‘이라 불린 상허 이태준 소설가의 <무서록(無序錄)>이다. 오래 알던, 보다는 우연히 만나 깊이 알게 된 작가다. 소설가라고 했지만 그가 쓴 소설보다는 가볍게 쓴 산문류의 글을 찾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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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시작, 성북동


우연은 2023년 시작됐다. 모처럼 서울 일정에 의미있는 할 일을 찾다가 성북동에 갔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즈음 '가슴에 금이 갔다'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다시 읽었고, 만해 한용운의 심우정이 있다는 정보를 챙겼다. 그동안 수차례 서울에 갔지만 한번도 발딛어보지 않은 동네라는 사실에 나름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탔다.

처음 가는 동네라 작정하고 동선을 짠다기 보다 마음가는 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곳이 '수연산방(壽硯山房)'이었다. 고즈넉하나 한옥카페로 꽤 알려진 곳이라고 했지만 처음은 슥하고 지나갔고, 돌아오는 길 무거운 다리와 갈증을 해소할 요량으로 줄을 섰다.

수연산방에서 이태준 소설가를 만났다. 그의 집이었으니 몰랐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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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지만 성북구에는 조선왕조 600년 유구한 역사길로 알려진 ‘한양도성길’과 시대를 앞선 이들의 아름다운 유산으로 남겨진 ‘성북 예술창작터’를 중심으로 ‘최순우 옛집’과 ‘선잠단지’가 있다. 그 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가치 있는 근현대 건축문화자산들과 더불어 아리랑고개, 미아리고개를 넘나 들며 문학적 열정이 모여 흘렀다는 사실이다.

아리랑고개는 성북동 정릉동에 소재한 고갯길이다. 돈암 사거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 동소문 동쪽으로 동선동을 지나 돈암동,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 시장 앞까지의 고갯길에서 춘사 나운규 선생이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을 기린 영화 '아리랑'를 촬영했다.

과거 ‘되너미 고개’로 불려진 미아리고개에는 돈암동 고개 혹은 돈암현이란 이름도 있다. 돈암동과 길음동 사이 미아로에 있는 둔덕이다. 한 때 우마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의 험준한 곳에는 발에 채이는 것 마다 서글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양 외곽 경계였다 보니 큰 전란이 있을 때마다 험하게 짓밟히고 피눈물을 뿌렸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숱한 교전과 생이별의 아픔으로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남았던 곳이다. 1960년대 점집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1980년대 100여곳 이상이 성업하며 점성촌을 이뤘지만 지금은 옛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동네에 오래 살았던 사람이 아닌 이상 "뒤돌아보고 또 돌아봐도"하는 구슬픈 노랫가사를 먼저 떠올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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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한국 문인.예인의 아지트가 있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1998년 일반에 개방해 공간과 이태준 소설가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냈지만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현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구인회’의 멤버로 활동하며 ‘달밤’ ‘돌다리’ ‘해방전후’ 등 뛰어난 단편들을 썼다. 그의 문장론인 <문장강화>는 아직도 대학 신입생들의 작문교재로 쓰일 정도지만, 월북 후 남은 가족들은 소위 ‘연좌제’에 묶여 수십년간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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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기운이 모여 흐르던


역사적이거나 환경적으로 문학적 기운이 모여드는 지세(계곡이 깊고 산세가 좋아 조선 시대부터 양반들의 별장터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1933년 이곳에 터를 잡고 난 후 문화예술인들이 꾸준히 들고 난 것이 기운을 만들었다. ‘수연산방’ 에 벼루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먹을 갈아 글을 쓰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만 봐도 이곳이 입지적 특성을 바탕으로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지금은 웨이팅 등록을 해놓고 젊은 연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기다림까지 즐겨야 했다.

사람들이 많아 찬찬히 둘러볼 기회는 얻지 못했다 대신 어색한 요즘 간판을 단 북카페 자리가 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좁은 계단과 문을 지나 통창의 좌식 공간이 긴 숨 같다. 그 느낌을 아주 잠시 누리고 단호박과 팥으로 만은 달지 않은 디저트와 옆자리의 과한 웃음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을 되풀이해 고쳐썼던 작가의 시간은 가고, 다음을 위해 ‘2시간’까지 가능한 누림의 특권이 남았다.

어찌됐든 그 인연으로 <문장강화>를 읽었다.

"어떤 대상이고 무심히 보거나 쉽사리 생각해선 안 된다. 감각과 사고가 예민해서 어떤 대상, 어떤 사태 든지 꿰뚫어 보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감상은 발견의 노력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육안 이상으로 정관, 응시, 명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주장하지 않는다. 역설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로서만 느끼고 감사하고 즐거워한다. '자기로서만' 이것이 감상문의 본령이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을 되풀이해 고쳐썼던 작가의 시간은 가고, 다음을 위해 ‘2시간’까지 가능한 누림의 특권을 얻은 뒤 짙게 밑줄을 그은 문장이다.


# '툭' 하고 던지는 마음의 소리


그리고 1년 이상 시간을 흘려보내고 새로 그의 글을 만났다. 1941년 산문집 ‘무서록(無序錄)’이다.

망설임없이 주문하고, 바로 펼쳤다. 생각보다 긴 호흡이 필요했다. 지금은 쓰이지 않아 사전에서도 사라진 단어나 예스럽다못해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들까지 몇번이고 다시 읽기를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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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쁨’이던 미세먼지가 서서히 사라진 오후, 제주의 시간은 더없이 그윽했다.

말그대로 flow한 시간. 몇 번인가 일로 만났던 지역의 속사정을 살피고, 앞으로 쓸 글의 방향을 구상하고, 방송원고를 넘겼다. 짧은 틈마다 사람과 더 좋아질 일을 대화와 텍스트로 남겼다.


어떻게 그렇게 해…싶지만 그 사이 차도 마시고, 책 몇 장을 읽고, 눈에 담고 싶은 것을 챙겼다.

세상을 바꿀 대단한 것들이 다 거창하고 화려하고 동적이지만은 않다.

오늘 읽은 부분은 그래서 더 녹진하게 몸에 감겼다. 벽에 대한 이야기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별 것인 존재가 확 하고 안겨든다.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았는 맛,

그런 벽면 아래에서

생각을 소화하며 어정거리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태준 #무서록_중_벽


#flow한 나의 시간을 꿈꾸며


물 속처럼 고요한 그 것에, 빛이 어리고 시선이 고이고 부담 따위를 덜어낸다. 무엇을 칠하던 자리를 지킨다. 마구 기대도, 무엇을 걸어도 군소리가 없다. 어쩌면 지붕보다 더 의미있는…안정감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冊' 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했던 이태준 소설가의 마음을 살피다가 나는 여기까지인가 하는 벽을 만났다. 그 벽을 넘어서면, 아니 그 벽에 스며들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좀더 마음에 와닿는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까.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다’했던 느낌은 앞으로 두 계절 정도를 더 보내고 나서 만날 생각이다. 밑줄을 그어뒀으니 잊지는 않을 일이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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