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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하고 포근한, '평범한 추억'의 감정이라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올해의 색 '모카 무스', 그리고

by 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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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그윽해 지는 '올해의 색'


‘모카 무스(Mocha Mousse)'. 컬러 전문 기업 팬톤이 2025년 올해의 색으로 선정한 색이다. 지난해 ’피치 퍼즈(Peach Fuzz)에 이어 은근하고 어딘지 그윽한 색감이 닮았다.

피치 퍼즈에 대해 팬톤은 불확실한 시기에 공동체와 포근함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기 위함이라 설명했다. 핑크와 오렌지 사이에 부드럽게 자리 잡은 색은 이전의 뭐랄까 베리페리(Very Peri), 비바 마젠타(Viva magenta), 얼티미트 그레이(Ultimate Gray)와 일루미네이팅(Illuminating), 클래식 블루(Classic Blue) 등 2020년 이후의 색감과 흐름을 같이 한다. 균형과 안정, 정신적 평화와 평온 같은 느낌을 포개고 포개다 이제는 덜어내고 비워 포용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초월하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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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밀다원'의 기억


따뜻한 중간 갈색의 ‘모카 무스’는 연결, 위로, 조화의 의미를 함축한다. 매년 시대의 흐름을 담은 컬러를 선정하여 전 세계가 공유하는 감정과 태도를 하나의 특별한 색으로 표현해 온 팬톤의 호흡을 감안한다면 코로나팬데믹 이후 더 날이 선 외로움‧고독에 대한 감정과 회복에 대한 간절함을 담고 있다. 처음 햇살을 머금은, 적당히 바랜 갈천의 색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더 부드러운 뭔가가 ‘밀다원’의 기억을 건드렸다.

한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함은 없지만 오래 눈을 대고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다. 어딘지 익숙한 것들과 온기라 부르는 것들이 연상된다고나 할까. 아늑하고 따뜻한 색감…은 자극적이지 않은 대신 주변 공기를 가라앉히는 은근한 중력을 발휘한다. 축하고 처지는 것과는 다른 느낌…피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나아갈 길에 대한 응원 비슷한 감정선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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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23436_001_20220118165001166.jpg 1953년 부산 40계단 앞 풍경. 스웨덴 대사관 제공


# 피란수도 부산의 이야기 조각


그래서 우연히 들었던 부산 ‘밀다원‘과 밀크 커피를 생각했다.

밀다원의 얘기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근처 카페에서 처음 접했다. 부산 일정이 늘어나며 혼자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주웠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어쩐지 쉽게 익숙해진 몇 안 되는 동선 안에서 일부러 크림이 들어간 커피 고른 일은, 라떼의 독특한 뒷맛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특별한 일이다.

'밀다원은 광복동 로터리에서 시청 쪽으로 조금 내려가서 있는 2층 다방이었다. 간판 바로 곁에 달린 도어를 밀고 들어서니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샛노란 평론가 조현식과 키가 크고 얼굴빛이 시뻘건 허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중구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당신도 왔군"하는 것이 조현식이요, "결국 다 오는군요"하는 것은 허윤이었다.' -김동리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중

피란수도였던 부산에는 전쟁 포화를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소설 만이 아니라 실제 광복동에 ‘밀락원‘이라는 다방이 있었다.


AKR20230703066000051_02_i_P4_20230722090119216.jpg 창선동 동아극장[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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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랑이 안타까웠던


전국에서 피란을 온 예술가들이 알음알음 모였던, 서울을 중심으로만 있었던 다방 문화가 서울이 폐허가 되고 난 뒤 부산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부산연구원 자료를 보면 당시 광복동에는 밀다원 외에도 금강다방, 대청동다방, 대도회 다방, 뉴서울 다방, 다이아몬드다방, 루네쌍스 다방, 봉선화 다방, 늘봄다방, 휘가로 다방, 에덴 다방 등이 있었다.

음악감상실을 겸한 밀다원, 레인보 에덴, 오아시스, 망향, 칸타빌레 등에는 김동리, 황순원, 김수영, 이중섭, 김환기, 윤이상, 유치환 등 유명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서로 교류했다고 전해진다.

제주에도 비슷한 시기 유사한 형태의 다방문화가 있다. 광복동 일대에 다방이 몰린 것은 인근 국제시장이 당시 전국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곳으로 급부상하며 돈과 사람이 몰려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주 칠성통은 파란 온 사람들이 제주항과 동문시장 주변에서 일할 기회를 찾고 무엇보다 바다 건너 두고온 혈육의 소식을 듣기 위해 머물렀던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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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별난 안식처에 머물고 싶은


다시 소설로 돌아와 광복동 네거리의 다방 밀다원은 가난한 화가 이중섭이 고통 속에서도 미술에 대한 꿈을 지켜냈던 생의 공간이었다. 피난민 대열 속에 끼어 부산으로 내려온 이중섭은 밀다원에서 화가 김환기, 백영수, 장욱진 등과 조우했다.

그들은 고통의 삶 속에서도 화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버리지 않았다. 어두운 다방 구석에 둘러앉아 예술을 논하고 창작욕을 불태우면서 서로를 격려했다. 이중섭의 유명한 은박지 그림들은 이곳 밀다원의 어두운 구석에서 그려졌다…고 썼다.

이 특이한 공간은 바깥세상에서 전개되고 있던 전쟁과 상관없이 강한 정서적 유대감으로 비자발적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한데 묶여 놓는다. 밀다원은 이 들의 마음을 뜻하게 품어주고, 의식주마저 제대로 해결 하지 못한 채 허덕이는 이들을 훈훈하게 보듬어준다. 유별난 안식처.. 소설은 시대가, 시절이 그러했다고 하기에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마무리 되지만 그 이름과 기억은 지금도 활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위로가 된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 올해의 색이 품은 의미는 남다르게 읽힌다. 꽤 힘들게, 마음 무겁게 지난해를 넘기고 여전히 쉽지 않은 올해를 마주한 상황을 굳이 상기하게 한다.

예기치 못한 현실 속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예술혼을 펼쳤던 이들의 그때와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수많은 변수들 속에 좀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연초부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서, 넘어도 넘어도 장애물이 밀려와서, 복잡하고 힘든 일들로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씁쓸하거나 묵직하거나 때론 달달한 커피 한 잔으로 숨돌릴 틈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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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억>을 떠올리며


이 색을 보고 개봉한지 이미 50년도 더 된 영화 <추억>을 떠올렸다.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그런 기억은 없지만 흥얼흥얼 영화음악을 더듬었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조각같은 얼굴이며 줄거리는 가물가물한 대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우수 짙은 저음 OST ‘The way we were’를 한참 찾아 들었다. 고교 방송부 영와음악 프로 DJ출신의 어떤 기억과는 다른 결이다. 별 거 아니지만 나를 아는, 아니 나를 잘 모르더라도 작은 공감과 추억팔이의 의미를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서로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인정하며 이별을 선택하고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사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녹아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랑의 온도가 고팠나보다. 누가 큰딸 아니랄까봐 동생을 돌보느라 바쁜 엄마 대신 아빠의 일을 도와 인스턴트 커피를 기가 막히게 탔던 어린 시절 어떤 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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