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신물질로드
3년여에 걸쳐 제주 도내 100여개 어촌계를 돌면서 신경 써 물었던 것이 있다. “어머니들은 서로 어떻게 부르셨어요. 동네에서는 뭐라고 부르던가요”
어딘지 서툴고, 또 서글픈 질문이다. ‘생업’이라는 기준 없이 아주 단순하게 물었다. 우문현답. “뭐라 부르기는 OO아, ##이 엄마야, ** 형님하고 불렀지”. 그러고 보니 해녀들이 부르는 바다밭 지명 어디에도 ‘해녀’ ‘잠녀’ ‘잠녜’ 같은 것은 없다. ‘##어멍똥싼여’ ‘$$이여’라고 들은 기억은 선명하다. 몇 번이고 “예?”하고 물었었다.
해녀 공동체라고 ‘해녀회’에 선을 긋고 볼 일이 아니었다.
취재 중 ‘잠수(潛嫂)’라는 호칭을 썼던 어촌계도 찾았었다. 엄밀히 따지면 시각차였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어촌계가 관리할 때는 ‘잠수’라고 불렀지만 실제 해녀들을 굳이 그런 호칭을 쓸 이유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상군이니 하군이니 하는 구분도 암묵적으로 자신과 주변의 평가를 종합해 결정했다. ‘오늘까지 소라 채취량이 누적 00㎏이니 이제부터 중군’하지도 않았고, ‘다음 물 때 물질은 A해녀, B해녀, C해녀가 하는 걸로’라고 구분 짓지도 않았다.
호칭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전부다. 역시 기록을 위한 것이란 걸 살필 수 있다. 잠수의 수는 ‘형수 수(嫂)’다. 호칭에 대놓고 ‘아주망(아주머니의 제주어)’이라 박았다. 어쩌면 남성들은 하지 않는 일이라고, 남성은 할 수 없다고 공개 선언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여성 중심의 해양문화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으니 다행일 수도 있겠다.
해녀 공동체는 ‘마을’과 연결된다. 생업이어서 그렇다. 해녀 물질은 가계는 물론이고 마을, 지역사회 경제까지 영향을 미쳤다. 협의의, 그러니까 ‘해녀회’라 부르는 해녀 공동체라는 형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구한말 구체적인 형태를 갖췄다는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는 없다. 당시 관련 문서나 신문기사 등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 전부다.
당시 '계'형태로 자생적인 공동체를 이뤘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기는 한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니 이후 지역조사에서는 그 형태를 찾지 못했다. 대신 작업권 확보나 권익 보호 등의 목적으로 어업공동체가 조직되는 일련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공출 등의 명목으로 해녀와 그들의 작업량을 계량화할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 근거다. 또 하나 이유는 출가물질이다. 작업할 바다를 놓고 종종 현지 어업인들과 다툼이 생기면서 힘을 합쳐 대응할 필요가 생겼다.
17세기 초 제주에 어사로 왔던 김상헌은, “제주성 안의 남정(男丁)은 500인이요 여정(女丁)이 800인이다. 대개 남정은 매우 귀하여 만약 사변을 만나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의 튼튼한 여자를 골라 살받이터 어구에 세워 여정이라고 칭하는데 삼읍(三邑, 제주(濟州), 대정(大靜), 정의(旌義)의 세 고을)이 한가지다.”(南槎錄.1601)라고 했다.
17세기 전반까지만 하여도 전복을 따는 것을 잠녀들이 전적으로 담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자 잠수 일을 하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의 수는 절대적으로 감소하였고, 그들이 맡던 전복 채취의 역을 잠녀들이 맡게 되었다. 제주목사였던 이원진(李元鎭)은, “해산물 채취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가 많다”(耽羅志, 1653)고 기록하고 있다 정의현감 김성구(金聲久)의 기록에는, “노인들의 말을 들으면 전에는 포작의 수가 대단히 많아서 족히 진상역에 응할 수 있었던 까닭에 진상할 때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는데, 경신년(1620) 이후로 거의 다 죽고 남은 사람이 많지 않다”(南遷錄, 1679)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6고역(六苦役)이라는 계층이 존재했다. 6고역이란 단순히 직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동하였다. 즉 원래는 목자(牧子)·답한(畓漢)·선격(船格)·과직(果直)·잠녀(潛女)·포작(鮑作)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목자·포작·지장(紙匠)·유군(遺軍)·답한·선격을, 19세기 전반에는 아병(牙兵)·목자·방군(防軍)·과직·선격·답한, 혹은 포작·답한·목자·방군·선격·아병을 지칭했다.
여성의 역과 관련된 잠녀역의 경우, 생업을 위해 해조류와 패류를 채취하는 해녀들의 역이었다. 이들은 관아에서 작성한 잠녀안(潛女案)에 의해 채취물의 일부를 진상, 관아용 명목으로 상납하여야 했는데, 액수가 연 7, 8필에 달하는 고액이었다. 더욱이 관아에 가져다 바칠 때 서리의 농간이 작용하면 그들의 1년 작업량으로도 상납이 모자라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김동전 ‘18.19세기 답한의 신분적 지위와 그 변동’.1993)
해녀회의 전신 격으로 '잠녀안(潛女案)'이 있다. 1700년대 기록에 나오는 이 문서는 국가에 바칠 조공품 생산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제주해녀를 관리하기 위해 작성됐다.
'조직'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1919년 10월 김태호(제주 조천리) 등 제주 유지들이 발기해 만든 제주도해녀어업조합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 4월16일 정식 발족한 조합은 당시 제주읍 삼도리에 본부를 두고 면마다 12개 지부를 뒀다. 부산과 목포, 여수에 출가 해녀 보호를 위한 출장소도 설치했다. 당시 제주에 적을 둔 해녀 8200명이 이 조합에 가입했다.
이 모든 것은 해녀의 노동력을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정리된다. 자생적 공동체를 제외하고 해녀가 직접 공동체를 이룬 경우는 제한적이다. 시대 상황만 다를 뿐 해녀들의 작업량을 파악하고 이를 경제적 이익으로 바꾸려는 목적이 깔려 있다. 심지어 해녀조합은 권익 보호라는 설립 취지가 어용화하면서 해녀항일항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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