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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an 03. 2022

평생을 해녀로 살아2-박화춘 할머니

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물질로드

△다시마 따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던

"그 때는 몰랐다. 그렇게 먼 곳인지.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고종사촌을 따라 나섰는데 가서 보니 소련이라고 했다. 사람들도 무섭고 바다도 무섭고…"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을 얘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지역이 있다. 중국 다렌·칭다오와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다. 과거 연구자들이 남긴 '**에 다녀왔다'는 기록은 지나다 들은 얘기라기보다 사실에 가깝다. 가공하거나 각색될 우려가 전혀 없던 시절의 채록이라 더 그렇다.

고 오성찬 작가(1940.0.18~2012.9.26.)의 취재용 수첩과 1987년 5월 새가정(새가정사)에 쓴 ‘기획르뽀/이땅의 여성들-제주도 해녀들의 거친 삶’, 「오성찬이 만난 20세기 제주사람들」(2000년·도서출판 반석)에 고 강예길 할머니가 등장한다.

인터뷰를 정리하면 강 할머니는 당시 소련령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시마 작업을 했다. 1985년 봄 행원에서 만난 강 할머니는 88세의 나이에도 비교적 온전하게 당시를 기억했다. 강 할머니는 객주였던 고종 사촌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4살이던 1922년과 이듬해 1923년 두 차례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었다. 그래서 원했던 돈을 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다른 해녀들과 마찬가지로 강 할머니 역시 해녀로 생을 마감했다.     

1987년 '새가정'에 게재된 고 오성찬 소설가의 '제주도 해녀들의 거친 삶'중

△제주사, 그리고 바깥물질

제주해녀를 살피는 기준은 매해 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주해녀의 바깥물질만 해도 1895년 시작해 1930년대 초중반 절정에 이른 뒤 해방시기까지 활동이 약해졌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최근에는 다른 해석들이 보태지고 있다.

'바깥물질'의 기준이 다양해진 때문이다. 제주에서 물질을 하다 건너갔는지, 아니면 물질을 목적으로 제주를 떠난 것인지 등 새로운 접근 통로가 생기는가 하면 부산 등 국내로 이동했다 다시 일본 등으로 옮겨가는 양상까지 다양하다.

'해녀'라는 단어를 단순하게 경제·산업적인 내용으로 해석하는 데서 벗어난 결과물들이다.

일본에 건너간 사연들도 보다 다양해졌다. 1세대 해녀들 중 상당수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등을 피해 일본행을 선택했다. 이들 중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은 해녀들은 계속해 물질을 하거나 다른 일을 찾아 바다를 떠났다.

2세대 해녀들은 광복을 전후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을 선택한 경우가 상당하다. 모집책을 중심으로 그룹을 이뤄 이동한 경우가 많다. 사실 이 경우는 1970년대 이후 이동을 살피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광복을 기준으로 1960년대에도 해녀들은 일본에 건너갔다.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대부분 밀항으로 바다를 건넌 까닭에 그들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어떤 경로로 어떤 일을 했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1.5세대, 그리고 2.5세대로 일본으로 바깥물질을 나간 제주해녀들을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출발한다.     


△떠나고 싶었던 바다에 몸을 던지고

박화춘 할머니(2018년 취재 당시 89세였지만 정정한 모습이셨다)

지난 2018년 취재 때 히가시오사카시 기시다도니시에서 만난 박화춘 할머니(당시 나이 89세)는 1955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너무도 가난해서" 무서울 여유가 없었다.

성산 출신인 박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물질을 배웠고 언니와 부산으로 바깥물질을 나갔다. 어린 나이에 제주가 아닌 곳에서 물질 말고 여러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뭍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여기에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덜컥 밀항을 선택했다. 일본에만 가면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시 돈으로 1만2000원을 냈다.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일본행을 감행한 16명은 배 바닥에서 숨을 죽인 채 더디기만 한 시간을 버텼다.

많은 비용을 치른 터였다. 바다 근처에는 아예 눈도 주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박 할머니는 결국 물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등록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야. 죽으나 사나 배운 게 이 것(물질)밖에 없는데 며칠 굶으니까 보이는 것이 없더라고. 38명이 같이 일을 했는데 그 중에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벌었지.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구좌 출신)이 그만하라고 성화를 해서 그만뒀지".

박 할머니는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강제 징용 등으로 끌려가거나 일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 수월했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는 국경 이동이 엄격했다.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이 강제송환된 첫 사례가 1950년 12월이었다는 것만 봐도 당시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해방과 더불어 귀향길에 올랐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4·3을 전후해 밀항이라는 수단으로 다시 일본을 택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단순한 생활고로 일본행을 선택했다는 말이 공공연했다. 하지만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연좌제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일본에 건너온 밀항자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정치 난민’들이었던 까닭에 어느 누구로 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다. 일을 구하면 다행이었지만 일에 하고도 온전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모여살면서 살 방법을 강구했다. 박 할머니 역시 그런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웃은 날보다 운 날이 더 많아”

오사카에서 기차와 버스로 12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이즈반도(시즈오카현 아타미)까지 가서 작업을 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셨어요?” “돈을 벌 수가 있어야지. 대마도에 가면 그나마 벌이가 좋다고 했는데 거기 가려면 돈이 있어야 했어. 그 때는 그렇게라도 돈을 벌 수 있어 다행이지만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하고 손사래를 친다.

박화순 할머니와 남긴 사진 한 장

‘웃은 날 보다 운 날이 더 많았다’는 하소연이 그냥 들리지 않는다.

박 할머니는 하나의 제주 역사였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를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박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4·3, 그리고 한국전쟁을 ‘군사훈련 받은 일’로 기억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학교 운동장에 불려 나와 제식훈련 따위를 했다. “선생이 나오라고 불러. 안가면 크게 혼이 났지. 이쪽으로 걸어라 저쪽으로 가라 하는데 혼이 다 나갈 지경이었지”

4·3이 발발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과 산으로 올라갔다 '빗개'역할을 했다.

빗개는 4·3 당시 토벌대와 무장대를 피해 제주 땅 곳곳에 몸을 숨긴 주민들이 은신처를 지키고자 망보기로 세웠던 아이들을 부르던 말이다. 감시원을 뜻하는 'Picket'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몰라 더 무서웠던 그 때는 그저 ‘벌벌 떨었던’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했지. 남자 아이들은 앞에 서고 여자 아이들이 뒤쪽에 서서 번을 섰어. 무섭지. 바스락 소리만 나도 덜덜 떨었는데 무섭다고도 못하고…".

한국전쟁 때는 너도나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4·3 때까지는 어머니 혼자 바다 일을 하며 가족을 건사했지만 전쟁이 나고 부터는 박 할머니도 눈치껏 바다에 따라갔다. 종일 물질을 해도 배를 곯아야 했다. 바다에 가지 않으면 다시 운동장에서 제식훈련 같은 걸 받았다. 어느 것 하나 편하지 않았다. 바다를, 아니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알 것만 같다.

박 할머니는 그 기억을 다 꺼내고 편한 듯 웃었다. 일본에 오래 살았지만 일본 이름은 ‘없다’고 했다. 행여 우리말을 잊을까 빈 종이마다 부지런히 ‘아는 말’ ‘기억하는 말’을 쓰고 또 쓰고 있다고 했다. 달력 모서리, 안내문 뒷면이 박 할머니의 기억들로 가득했다.

박화춘 할머니가 매일 써서 남긴다는 기억들
박화춘 할머니가 보관중인 일본 내 한국인 종군위안부 관련 재판 기록들.

일본에서 진행된 종군위안부 판결 관련 기록도 계속해 보고 계셨다. “(일본이)이럴 줄 알았지. 결과가 어떻든 누군가는 이런 내용을 계속 알고 있어야지.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그냥 눈물이 났는데 울 수 없었다. 그래서 덥썩하고 박 할머니를 끌어 안았다. “오늘 둘 다 분홍색 콘셉트니까 그 기념으로 사진 찍어요”

‘다 늙은 얼굴 찍지 마라’하셨지만 그럴 순 없었다. “너무 고우신데요. 저를 위해서 한 장만” 현상해서 꼭 가져다 드린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이 사진을 전해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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