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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10. 2022

자이니치, 조선적, 햐쿠키로 오바상

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 신(新)물질 로드-역사가 된 '해녀 양씨'

Apple TV+ 웹드라마 《파친코》 포스터ⓒApple TV+ 제공


‘파친코’때문이었다. 취재 수첩을, 외장 하드를, 현실에 치어 어느 순간 바싹하고 말라버린 기억력이란 이름의 검은 바다를 뒤적인 것은. 시즌 1의 마지막 회 끝부분 90세는 가뿐히 넘긴 자이니치 할머니의 인터뷰가 툭 하고 기척을 한다. “혹시 잊어버린 것이 있지는 않은지…” 아하, 슬그머니 잊고 있었다. 오사카 이쿠노구 ‘햐쿠키로 오바상’을.  ‘해녀 양씨’로 기록된 역사를.


영화 '해녀 양씨' 한 장면

‘광복 70주년’이던 2015년 5월, 제주 출신 해녀 한 명이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아흔 아홉의 삶을 마감했다.

“도둑질도 못허난 물질을 헷주(도둑질도 못해서 물질을 했다)”는 노 해녀는 여든 살까지 바다에 나갔다. 고향 제주는 아니었지만 바다에서는 늘 마음이 편했다.

1916년 제주시 동복리에서 태어난 노해녀의 이름은 양의헌이다. 열여덟에 결혼했고, 그의 기억에 따르면 열 아홉 살부터 물질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이미 일본 열도의 바다에서 자맥질을 했다. 남편과 사별하면서 혼자 세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엄마는 더 오래 숨을 참고 더 깊은 바다를 숨볐다.

여러 인터뷰에서 들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이다. 오죽하면 ‘칠성판(관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진 나무판으로 5푼 정도 두께의 송판에 북두칠성 모양의 구멍을 7개 뚫어 옻칠을 한 것)을 지고 물에 든다’고 했을까.

도둑질을 못해 물질을 했다는 노 해녀의 말은 씹을수록 쓴 맛이 난다. 제주 해녀라고 바다가 좋기만 했을까. 제주 해녀의 무대는 제주도 그 이상이었다. 돛배를 타고 섬을 벗어나 뭍 바다에 머무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 더 작고 험한 섬에 의지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기선(汽船)을 타고 말 설고 물도 선 해외까지 갔다.

일제강점기 일본 어업인들로 제주 바다가 탈탈 털리다 못해 해녀들의 생존권까지 움켜쥐었을 때 일본 오사카와 연결된 항로가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922년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君代丸)라는 정기 연락선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행을 선택한 해녀들도 끼어 있었다.

재일 1세대 해녀들의 기억을 모아보면 물질이 목적인 경우는 일부에 그쳤다. 시기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화약 원료 등으로 쓰이는 감태 채취 인력으로 징용됐거나 중개인을 따라 이주했거나(지바현 미나미보소 와다우라에는 제주 출신 박기만이 고향에서 해녀 12명과 그들의 가족 40여명을 이주시켰다는 내용의 증언 및 조사 자료가 남아있다),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결국 바다에 들어간 사연들까지 다양하다.     

해방을 맞기까지 매년 이런 식으로 1500여명의 해녀들이 일본 물질에 나섰다. 해방을 맞으며 제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그냥 눌러앉는 경우도 있었다.

고 양의헌 할머니

양 할머니는 1941년 오사카에 정착했다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미군의 일본 공습이 심해지자 고향 제주도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4·3 광풍은 양할머니를 다시 일본 바다에 뛰어들게 하는 이유가 됐다. 제주섬을 붉은눈으로 봤던 미군정은 당시 제주 전 지역의 해상교통을 차단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은 밀항이라는 은밀한 단어를 통해 성사됐다.

그 시기 일본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사령부(GHQ) 자료에는 1948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일본 규슈에서 검거된 제주지역 밀항자수가 49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잡히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4·3 때 일본으로 밀항한 이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절이 그랬다. 밀항 중 발각될 것을 걱정한 밀항책은 어린 아이의 승선을 거부했다. 꼭 데리러 오마하고 떼어놓고 온 세 살 난 딸과는 그 이후 말그대로 생이별을 해야 했다. 1959년 잠시 품었지만 끝내 제주로 보냈다.이후  다시 만날 때까지 무려 4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시대가 그랬다고 하기에는 기구하고 아팠다. 양 할머니는 오사카에서 조총련계 남편을 만나 재혼을 하면서 모두 7남매의 어머니가 됐다. 두 번째 남편은 조총련계 학교를 만든다고 밖으로 돌았고 가족을 돌보는 일은 온전히 양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일본에서도 바다를 찾아 떠돌았다. 쓰시마에서 1년 우도 출신 해녀에게 다시 물질을 배웠다는 얘기도 했다. 그렇게 매년 3월부터 10월까지 쓰시마에서 물질을 했다. 거친 바위들이 많은 바다에서 잠수기선을 타고 수심 50m가 넘는 물속을 들락날락 아침에 들어가면 점심 때가 돼서야 겨우 하늘을 봤을 만큼 험한 작업 환경을 견뎠다. 그렇게 몇 년을 악착같이 바다와 싸우면서 집도 사고, 애들도 결혼시켰다. ‘햐쿠키로 오바상’이란 별명은 그 때 얻었다.

양 할머니는 쓰시마 뿐만 아니라 미에현 도바 지역까지 원정 물질을 나섰다. 70세가 되는 1985년까지 물질 만큼은 자신 있었다. “한번 물에 들어가면 망사리에 100㎏을 채우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해서 ‘햐쿠키로 오바상(100㎏ 할머니)’이라고 불렸다”고 양 할머니는 말했다. 별명 말고 잠수병도 얻었다.     

이지유 작 'family reunion 해녀 양의헌과 북의 가족'(2018, 캔버스에 아크릴)

그런 양 할머니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 할머니가 오랜 시간 고향 제주 땅을 밟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다. <파친코>의 선자는 ‘자이니치’(在日)였지만 오사카 양 할머니는 그 안에서도 국적이 없는 조선적(朝鮮)이다.

조선적은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후 1947년에 주일 미군정이 재일 한국인에게 외국인 등록제도의 편의상 만들어 부여한 임시 국적이다. 현재는 이 가운데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용도로 쓰인다.

6·25전쟁 후 1960년대 북송사업이 한창이던 때 양 할머니의 세 아들은 북으로 갔다. 이유없는 차별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절망감에 고등학생이던 아들들이 차례로 어머니 곁을 떠났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꿈이 됐다. 행여 북에 있는 아들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주에 남은 딸을 놓을 수도 없었다.

21차례 방북을 해 아들들을 만났지만 고향 제주방문은 지난 2002년이 처음이었다. 무려 53년 만에 만난 딸은 지난 시간 만큼 멀었다. 제주에 남은 딸은 양 할머니보다 먼저 하늘 소풍을 떠났다. ‘내 소원은 통일’이라는 양 할머니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쟁쟁하다.     

다시 ‘파친코’로 돌아가 마지막 인터뷰 속 할머니들이 전한 얘기가 오버랩된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에 어려움은 없었어요. 내가 선택해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아요” “모두가 꿈같아요. 이것도 저것도”


영화 '해녀 양씨'중 한 장면
일본 오사카 자료 조사 중 찾은 '재일(한국인) 여성의 전중.전후-할머니의 넋두리'



양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은 다큐멘터리로 세상에 알려졌다. 2004년 일본 관객들 앞에 개봉, 눈물을 쏟게 했던 영화, ‘해녀 양씨’다.

사쿠라영화사에서 만든 이 작품은 마사키 하라무라라는 한 일본인 감독이 창고에 보관 중이던 낡은 흑백 필름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나올 기회를 얻었다. 하라무라 감독은 재일동포 3세와 일본 젊은이들의 만남을 다룬 ‘조우’  등 재일조선인 작품을 6편이나 찍었다. 그가 발견한 필름은 1960년대 재일조선인 연구자 고 신기수씨가 당시 40대였던 그녀를 영화화하려고 시도했다가 남겨둔 것이었다. 재일 1세대 여성의 노동과 삶의 애환을 담고자 3년에 걸쳐 기록하는 사이 양 할머니는 50대의 얼굴이 된다. 필름 속 주인공을 찾은 일본인 감독은 오랜 설득 끝에 양 할머니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렇게 자이니치, 그리고 조선적의 아픔을 담은 80대 할머니의 공허한 시선이 포개진다. 영화 가운데 북한의 영상은 양 할머니의 아들 가족이 촬영한 것이다. 잠수 장면 등의 필름은 재일동포 김성학씨가 제공했다. 일본인 감독은 카메라 너머의 시선을 통해 "나는 그녀에게서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한국의 분단에서 비롯된 깊은 슬픔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저 ‘어머니’였던 양 할머니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산증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역사다. 아직 다 품지 못해 아물지 않은 상처다.

‘해녀 양씨’는 2004년 4월8일 도쿄에서의 첫 상영회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그 해 ‘해녀 양씨’는 일본 문화청이 주관하는 제2회 문화청 영화상에서 ‘문화기록영화’ 대상 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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