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 신(新)물질로드-칠머리당 영등굿, 그리고
21일 문화재청 보도자료에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등장했다. 무형문화재, 이제는 무형유산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 시연 행사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이 즈음은 좀 뜻밖이라 내용을 나름 꼼꼼하게 살폈다. 아직도 굿판에 서는 김윤수 심방이 손 때 묻은 무구를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했다는 내용이다. 제주에서 문화부 기자를 꽤 오래했던 터라 익숙한 이름이다. 부지런히 예전 자료를 뒤져봤다. ‘제주 예맥(藝脈)’이라고 지역문화예술계 원로와 인터뷰를 하는 2012년 기획 속에서 그를 찾았다.
# 문화유산의 영역에서
칠머리당영등굿은 제주도의 여러 당굿(마을 성소인 당(堂)에 항상 있는 당신(堂神)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 중 하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회장 김윤수)와 산지어촌계, 산지어민회, 어선주협회 특히 단골인 해녀가 제주 문화유산이다.
故 안사인 심방(무당의 제주어)이 신을 청하던 1980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됐고, 1995년 김윤수 심방에게 역할이 넘겨진 후 2009년 9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재됐다.
10년 전 인터뷰여서 그런지 행간에 지금보다 ‘힘 넘치는’ 목소리가 쨍쨍하다.
"굿이 굿이지 뭐 특별한 것은 없어. 지금까지 해온 것도 그렇고, 앞으로 할 것도 그렇고, 계속 전해져야 할 것도 마찬가지야".
'해양문화를 기반으로 한 무속문화'라는 해석을 하기는 하지만 심방은 무속인이고, 굿은 무속행위로 바라보는 시선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더 불편해졌다. 다만 제주에서는 공동체 문화를 이루는 한 부분임을 거듭 강조해 둔다.
당시 인터뷰에서 예맥이란 표현을 낯설어 했던 김윤수 심방은 "굿이 지니고 있는 정체성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뭐든 흘러야지 고인 것이 잘 됐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굿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굿은 하나의 종합 예술이다. 흔히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은 장르를 설명할 때는 넘치도록 쓰면서 정작 우리 것에는 지독히 아끼는 단어다. ‘굿은 굿(Good)’이라 했던 누군가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윤수 심방도 비슷한 말을 했다. "굿을 하려면 소리를 해야 하고 굿춤과 사설이 이어져야 한다. 거기에 연물 장단까지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신당이라 부르는 공간은 마구 사라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을 문화의 중심이 됐던 것들"이라며 "굿 하나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근간이 됐던 것부터 차근차근 챙겨야 '무속문화'라는 것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앙과 문화의 사이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무속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전통 굿문화를 '무속문화'의 반열에 올린 대표적인 모델이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유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이란 타이틀로 제주 전통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관문이 됐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제주라는 섬이 지닌 독특한 문화 정체성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심방의 사설은 섬이 '신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 재차별로 무용과 연극, 음악적 요소가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섬 밖의 기준이라는 점이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국가지정문화재라는 이유로 제주도지정문화재들에 비해 오히려 지역적 관심이 덜한 등 홀대를 받아왔다. 제주 대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작업은 더뎠다.
도로을 내고 국가관련 시설을 만든다고 당석을 옮기기도 했고, 칠머리당 보수 작업을 진행하는데만 수년이 걸렸다.
같은 유네스코 지정 '유산'이지만 자연유산의 경우 '유네스코 3관왕'이라는 대대적인 홍보와 더불어 300억 원 규모의 세계자연유산센터까지 만들어 활용하고 있는 것과는 아직도 온도차가 크다.
#전통 '굿' 상징 자리매김
매년 음력 2월14일이면 지역 해녀들이 제주칠머리당영등굿 현장에 출석부처럼 열명(列名)을 건다. 시렁목에 가족들의 안녕과 무사고에 대한 염원을 담아 심방의 입을 빌어 영등신에게 전한다. '각산받음'(점 쳐주기), '액막이', '도액막음'의 과정이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강점은 현재 지역 마다 전해지는 영등굿 중 원형을 제일 잘 보존하는데 있다. 영등굿의 기본형인 초감제→요왕맞이→씨드림·씨점→배방선의 과정을 충실히 진행하는데다 초감제와 요왕맞이 사이에 본향듦, 씨드림·씨점과 배방선 사이에 영감놀이가 삽입돼 제주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해녀들은 영등굿이 치러지기 전 전복과 소라, 문어 등 제물을 직접 물질해 준비하고 어부들은 집집마다 개인상을 차려온다. 아니 왔었다. 지금은 예산 범위 안에서 준비한다.
그랬다고 내용마저 돈에 맞추지 않는다.
심방이 '올해는 바다에 다니는 길 자손들 다니는 길도 바로잡아 줄 듯하고 요왕에서 크게 다치거나 넋 날 일도 막아주면, 영등할마님과 한집님의 덕으로 아시라 하십니다'라고 사설을 풀어내면 하나 같이 ‘고맙다’고 답한다.
알려진 만큼 찾는 사람도 많다. 학계를 중심으로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사설을 기록하고 심지어 음성학적으로 심방의 어조를 연구하는 이도 있다. 해마다 일본에서 '굿'을 찾아 제주를 찾는 연구모임도 있을 정도였지만 한일 관계 악화에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조용해졌다.
전승과 단절의 위태로운 경계에 속에서 생생문화재 사업을 통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매년 조금씩 콘텐츠 가치를 인정하고 무속문화와 생태관광을 접목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가 감행됐다. 굿을 이루는 문화 예술적 요소들과 연희적 접근, 기메 등 공작 체험 등 대중화 노력 역시 꾸준했다.
무속문화라는 것이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과거 그랬던 것처럼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에 ‘살아있는’문화여야 제대로 전승될 수 있다는 의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어떤 ‘무구’인가
제주칠머리당영등굿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데는 사실 이유가 있다.
보도자료 내용이 뭔가 허술하고 헐렁헐렁한 느낌인데 그 사실을 알고 묻고 살필 누군가가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보도자료에 등장한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보조 기록일 수 있지만 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자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알고 있을’사람을 찾고, 보도자료 작성 기관 담당자에게 물었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이 21일 진행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소장자료 기증식에서는 종묘제례악·처용무 고(故) 김천흥 명예보유자의 유품과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 김윤수의 소장 자료로 총 1246건이 기증됐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 김윤수 심방이 내놓은 것들은 어쩌면 바로 어제까지 손을 탔던 것들이라 의미가 있다. 심방들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료이기도 하다.
기증품은 보도자료에 나온 울북, 설쇠 등 연물과 신복 등 큰 의미의 ‘무구(巫具)’에 포함된 14점이다.
제주 무속문화에서 무구라고 하면 ‘멩두’를 칭한다. 신칼과 산판, 요령(방울)을 아울러 ‘삼멩두’라고 부른다. 산판은 엽전 모양의 천문(하늘의 돈)과 술잔 모양의 상잔(점치는 잔)과 접시모양의 산대(천문과 상잔을 담아주는 그릇)로 구성됐다.
심방은 이 삼멩두를 던져 떨어진 상태를 보아서 신의 마음을 헤아려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이번 기증한 무구에는 삼멩두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연물이라 부르는, 굿 연희에서 쓰는 무악기가 기증됐다. 전문악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심방이면 누구나 연물 치는 방법을 배웠다. 연행에서는 심방을 보조하는 소미가 채를 잡는다.
연물은 구덕북, 설쒜(쇠), 대양(징), 장구로 구성한다. 기증품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은 대양이다. 김윤수 심방의 기억으로도 100년은 넘은 물건이다. 울북은 1960~70년대 악기 장인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지금껏 사용하던 것이다. 양쪽 가죽 두께를 다르게 해 소리를 만든다. 북채는 김윤수 심방이 직접 제작했다고 했다. 그보다 더 나이를 먹은 것은 북을 고정하는 북마리(구덕)다. 1950~60년대 제작한 것이라고 하니 최소 60년은 된 물건이다.
설쒜도 197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했다. 밥그릇 모양이 악기를 엎어놓고 채로 두드리는 것으로 소리를 낸다. 채는 역시 김윤수 심방이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울북과 설쒜 모두 고 양금석 심방이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심방들 사이에서는 무구를 새로 제작하기도 하지만 다른 심방의 것을 물려받는 경우가 흔했다. 악기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앞선 심방이 모시던 신까지 굿에 모실 수 있어 더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다른 심방의 자료를 살펴보면 ‘무구가 없어 선배의 것을 빌려 굿을 했다’낸 내용도 종종 등장한다. 고 양금석 심방은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와는 인연이 없지만 자신이 쓰던 무악기를 물려주는 것으로 전통을 얹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기증품은 ‘무복’이다. 관디와 퀘지 등은 심방의 성별이나 굿의 성격에 따른 조금씩 다르다. 김윤수 심방이 20여년 전에 제작해 연행 때 직접 착용했던 것들이 무형유산의 이름으로 세상과 만나게 됐다.
생각 같아서는 이런 내용도 자세히 알 수 있게 정리해주면 싶지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겠다 싶다.
종이 무구인 기메까지 섬 밖에서 특별한 만남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노파심에 거듭 강조하지만 제주 무속문화는 길흉화복을 점친다기 보다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을 들어주고, 조심해야 할 것을 공유하는 의미가 더 크다. 제주는 사람과 신이 산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신’들의 고향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