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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 정말 애 많이 쓰셨어요

나의 소소한 제주일상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_이제 봄

by 고미


#지고지순에 대하여


지고지순. 그러니 순수하게.


가곡 ‘떠나가는 배’는 테너 안형일이 1952년 가을에 처음 불러 발표했다. 제주 제일중학교 국어교사이던 양중해 시인(19272007)의 시에,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던 동료 변훈(19262000)이 곡을 붙인 명곡이다.


곡 배경에 대한 해석은 생각보다 많다.

6·25전쟁 피란을 와서 살다가 정든 사람들이 헤어져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들을 보며 느낀 감성을 읊었다는 얘기도 있고. 제자와 사랑에 빠져 제주도로 도피해 살다 이별한 시인 박목월의 사연을 담았다는 설도 있다.(박목월 시인의 ‘제주 동거’는 1950년대 후반 한때였다…고 한다)


1952년 젊은 연인의 애틋한 감정을 허락할 수 없었던 여성의 부모가 둘을 갈라놓기 위해 여성을 강제로 배를 태워 부산으로 보냈던, 친구인가 후배인가 했던 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시로 썼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 때 그 시절의 ‘우리’는


시간이 조금 더 흘러 1960년대 제주도에서 2025년 서울까지 인연을 이어가는 ‘요망진’애순과 우직한 관식의 이야기가 잔잔하지만 힘있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너무나 어렸고, 여전히 여린 당신의 계절에게‘를 내건 한 OTT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다.

제주에서 함께 나고 자란 이들의 순수한 10대 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세월을 견뎌낸 중장년 시절까지의 일생을 사계절로 나눠 그렸다…는 작품의 평가는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하나로 모아진다.


지역에서는 ‘제주어‘가 잘 안들린다는 반응이 먼저 나왔다. 어머니 해녀의 모질고 험했던 삶과 대물림에 대한 극렬한 저항에서 강한 모성애와 억척스런 그네들의 인생을 공감하거나 조금 다른 결을 읽은 경우도 있었다.

#힘들고 고단했던 시절에 부쳐


당시 제주 섬살이가 어떠했는지는 차마 말로 풀어내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제주4.3과 6.25전쟁, 예비검속까지 거치고 넘으며 속이 문드러지다 못해 다 타서 없어졌지만 꺼내 말 못하던 시절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고, 해녀들이 없는 돈까지 털어가며 목숨을 건 밀항으로 나라 밖애 나가 돈벌이를 해야 했다. 1950년대 중후반 타지역으로 바깥물질을 나갔던 해녀들이 홀대와 차별도 모자라 지역 이기주의에 밀려 생고생을 했던 사연도 굽이 굽이 골이 깊다. 1967년 경상북도의 ‘입어관행권 소멸 확인 소송’ 재정 청구로 70년간 유지되어온 ‘입어관행’ 사라지며 ‘해녀 안보내기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현금을 바로 손에 쥘 수 있었지만 그만큼 고달픔과 고된 노동의 무게가 유독 컸던 사연이 배경에 깔려 있음이다. 입 하나 덜기 위해 육지 어느 마을들에서 제주 해녀에게 딸을 맡기기도 했던, 편한 곳 없이 우울했던 때였다. 유난히 박하고 사나운 그네들의 사정을 이렇게 풀어 본다.


1960년대 제주에서는 영화 촬영이 잇따랐고, 제일극장, 대정 상설극장, 대한극장, 동양극장, 서귀포 삼일극장 등 현대식 극장도 하나둘 문을 열었다. 그에 편승해 '서울 스타일’ 이른바 서울X추룩 바람도 꽤 세게 불었었다.

이런 사연까지 두루 조사했으면 정말 대단한 거고, 그러지않더라도 이해는 된다…는 대충 그런 느낌.



이런 얘기를 왜 구구절절 하는가 하면, 그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인 ‘섬만 떠나면’의 장밋빛 기대와 출세 또는 자존감의 기준에 그저 웃었다는 고백에 더해 아직 ’관식’같은 남성상을 제주와 관련한 얘기들에서 들어본 적 없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 우리 ‘관식’이를 찾아요


제주 신화 속에서 남성은 훌훌 버리고 떠나거나 능력 있는 여성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긴다. 조선 시대 사랑 이야기 속에서도 순정에 목숨을 걸고 지고지순 기다림을 택한 것은 여성이다. 살아남은 비극을 감수하고 지키고 일어서는 책임을 지고 버텼던 이도 여성이었다.

해녀노래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술 값에 다 써버린 이, 족은각시를 들이는 이, 아… 그보다 더 일찍 군역, 노역의 짐을 놓고 섬을 떠나 그 역할을 여성에게 넘겼던 이들 중에 ‘관식’이 있었을까…있었겠지…하면서도 영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자꾸만 ‘다시 보기‘를 누르게 한다. 그리고 남들처럼 줄줄 눈물을 흘린다. 시절이, 시대가 그러했으니 하고 아는 만큼 아니 몰라도가만히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흘러가는 세월은 붙들지 못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하고 싶은 대로‘ 살자, 잘 살아보자. 그 마음으로 버티고 버텨냈으리라.



넷플릭스 영어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인생이 그대에게 귤을 줄 때…라 ’새콤달콤’인가했는데 미국 속담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을 패러디한 제목이라고 한다. 인생 꼬여서 시고 씁쓸하다고 투덜대지말고 레모네이드 만들어 마시면 달라지지 않겠냐는 인생 교훈이 톡톡 짜릿하게 터진다.

그러니 세상 정겹고 따순 위로다. ’폭싹 속았수다‘는.



* 옛 사진은 ‘고영일이 만난 1960~1980’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에서 발췌했습니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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