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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본 듯이, 꽃 된 듯이 먹 춤추다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현병찬 초청전 춤추는 먹의 향연

by 고미

#봄 바람에 먹 스미고 번지고


길을 잃으면 키가 큰 나무에게 물어야지
그들은 언제나 멋진 답을 알고 있어
이제 난 가장 나 다운 게 무엇인지 알겠어
잘 알겠어
나는 찾아가려 해 신비로운 꿈
서로 눈을 맞출 때 더 푸르르던 숲
가장 높은 절벽에 올라가 소리쳐
멀리 세상 저편에 날 기다리는
#유아_숲의 아이_중


여든을 넘어선 노 서예가는 몽환적이면서도 다이나믹한 선율의 아이돌 노래를 먹에 녹였다. 통통 튀는 리듬이 붓 끝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이 은근한 봄 기운이 스며나온다.


번지거나 스미거나 흐르거나 하는 먹과 한지의 특성이 서로를 부추기며 한껏 매력을 끌어낸다. 그 안에서 다른 생각을 할 재간이 없다. 가까이 다가섰다 다시 멀리 거리를 뒀다 하는 사이로 ‘꽃’기운이 유난하다. ‘꽃의 인연은 꽃이 피어나 향기가 머물 때까지라는 것을’이란 문장에 발을 내렸다. 조심스레 움직이는데 걸음걸음 꽃이 밟힌다. 숲도 있고, 나무도 있고, 플도 있고 다 있는데 혼자 ‘꽃’에 꽂혀 ‘어쩐다‘만 무한재생한다.


# 지역 신문사 ‘문화부‘가 만든 인연


한곬 현병찬 선생님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어림잡아 족히 20년이 넘는다. 지역 신문사 문화부라는 것이 참 엄청난 것이 특정한 장르 하나가 아니라 전 분야를 두루 살펴야 하는 현장직이다. 누가 보면 공연장이나 전시장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로워야할 곳들에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그들의 언어를 듣고 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사회면 데뷔를 문화부에서 했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그래도 문화부가 특별한 것은 한 길을 깊고 그윽하게 쌓으며 길을 만든 분들과 시대, 세대를 뛰어넘는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병찬 선생님과도 언제 만나도 편안하게 오늘을 얘기할 수 있다. ‘하얀 것은 종이, 까만 것은 글자’인 것만 알던 문화부 막내 때부터 늘 잠잖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시고 또 들어주신다.

몇해 전 오래 옆을 지켜주던 부인을 앞세우고, 지난해 제주시 한경면 작업 공간과 작품 1088점을 조건 없이 제주도에 기부했던 과정까지 알고 살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꽃 같던 이에 대한 마음이 공들여 가꾸고 꽉 채운 삶에 슬그머니 만든 여백을 타고 들고 난다.

# 현병찬 초청전 ‘춤추는 먹의 향연’


제주문화예술진흥원이 기획한 '춤추는 먹의 향연'초청전 일정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선생님을 뵐 생각에 개막식 시간을 미리 챙기기까지 했는데 일부러 더디게 찾아갔다.

제주문예회관 제1·2·3전시실을 모두 쓰는 이번 전시에는 총 105점이 걸렸다.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 얘기를 들었던 터라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2025년 새봄’에 작업한 작품들까지 꼭 맞은 자리에서 역할을 한다.


1전시실에서는 대표작 '먹의 향연'과 작업 영상이 시선을 붙든다면 2전시실에서는 가로 910cm, 세로 900cm에 달하는 대작 '밤하늘'이 시간을 붙든다. 마치 숲을 걷는 것처럼 어린 풀 특유의 풋내와 싱그러운 나무향이 엉키고 시간의 자리를 차지한 낯익은 기운이 미끄러지듯 낮게 기어가다 사라진다.

3전시실에서는 '곶자왈' ‘한글‘ 등 소중한 것들을 단단하게 한 결과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작품, 어느 전시실에 으뜸을 주기 어려울 만큼 힘이 느껴져 몇 번리고 멈춰서 숨을 골랐다.

# 꽃 본 듯이 소년의 걸음을 따라


직접 지은 시에 그동안 연마하며 품은 문장까지 감수성 가득한 서가를 누비는 듯 넉넉해 진다. ‘숲의 아이’는 가사가 좋아서…라고 하셨지만 작품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든 ‘소년’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저지의 먹글이 있는 집 공간이 한 폭 또 한 폭 옮겨진 느낌도, 좋았다.


사실 꽃만 따라 걸었다. 그 한 글자가 그만 애틋했다. ‘향기가 머물 때’의 뒷편에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 내가 꽃인 듯이, 마음 속 꽃 진듯이… 서툴게 거닐었다.


*전시는 3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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