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벌면 하루 살 수 있는데 그 하루가 참 치사하네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폭싹 속았수다' 그 여름 같은 아버지

by 고미

# '그 시절을 살았다'는 것


‘그 시절을 살았다’는 것에는 참 많은 의미가 있다. 10여년 전 <응답하라>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겐 애틋하고 그리운 노스탤지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가슴에 파묻고 새겼던 것들의 소환이자 회한이기도 하다.

OTT 드라마 하나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응답하라>시리즈가 부산에서 시작해 서울 신촌 하숙집, 쌍문동 골목길까지 당시 도시에 살았던 소시민의 삶을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이벤트와 굵직한 사건 사고 등과 연결했다면 <폭싹 속았수다>는 그 시절을 살게 헸던 부모 세대의 생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을 서울에서는 가장 먼, 그리고 거칠고 고되게 살았던 제주를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넷플릭스 글로벌 TOP10 시리즈(비영어)부문 4위라는 성적과 다양한 해석과 ‘제주 사람들은…’ ‘주요 찰영지는…’ 하는 코멘터리 형식의 짧은 영상 등등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드라마를 만든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보는 사람마다,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울컥하고 눈물을 쏟는 포인트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지’하는 장면은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의 어떤 해석이 접근을, 아쉽지만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마치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 엄마, 나 그리고 그 다음


드라마에서 엄마 애순은 1950년 생으로 소개된다. 18살에 낳은 큰 딸 금명이는 1968년 87학번이다. 우연처럼 친정엄마가 1950년에 태어나셨고, 애순 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이른 나이인 23살에 첫 딸인 나를 낳았다. 비슷한 시기를 부대끼며 살았으니 어쩌면 드라마 속 사정에 감정이입이 됐다가 현실로 돌아왔다가를 마치 극본을 쓴 작가인 듯 오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보다 10살 나이가 많은 아빠는 극중 ‘관식’과는 다른 이른바 ‘화이트칼라’셨다. 잠깐 교편을 잡으셨다가 금융 관련 회사를 거쳐 법률 서비스 일을 하셨다. 학창 시절에는 육상부 선수 생활도 하셨다. 지금 기억에도 아빠가 사투리를 쓰는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상을 나와 잠깐 직장생활을 했던 엄마도 시장에서 흥정을 할 때나 외할머니와 대화를 할 때 정도가 아니면 표준어를 쓰셨다. 오죽하면 취업을 하면서 “제주에서 취재를 하겠다는 X이 어디 곤말만 쓰고 앉아 있냐. 사투리 하나 못 쓰냐”는 선배들의 서릿발 같은 지적에 특별 과외(?)를 받기도 했다. 암튼 ‘촌에따이’는 아니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살민 살아진다, 살암시믄 살아진다


‘살민 살아진다’ ‘살암시믄 살아진다’는 얘기는 해녀 공동체를 취재하면서, 4‧3과 만나면서 새겼던 말들이다. 뮤지컬 서편제의 넘버 중 하나인 ‘살다보면’이 그랬든 힘든 시절, 더 힘든 과정을 넘어야 했던 이들에게는 주문과 같은 말들이다. 누가 더 힘들었는지 경쟁할 이유 따위는 없다. 버틸 힘도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해주고, 모자란 부분을 살펴주고 했던 그 마음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애순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해녀삼춘들이, 스며들 듯 애순이의 편이 되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도희정’ 새엄마의 존재, 며느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금지 가장 깊숙한 곳에 간직했던 ‘(부녀)계’돈이, 꼭 세 식구 먹을 만큼만 채워지던 쌀독이 ‘살아진다’를 만든다.



# 힘겨웠지만 힘났던 시절, 에

생존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삶의 현장에 여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성은? 이번 ‘여름’에서 유독 그 자리를 살피게 된 것은 그나마 ‘어깨’로 상징됐던 <응답하라>시리즈의 그들과 다른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도, 늘 마음 한켠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기억되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시기상 1960~70년대 제주는 남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다른 지역들은 ‘전쟁 후 복구’라는 목적 아래 넓게 길을 내고 큰 공장을 짓고 했지만 제주는 모든 작업들에서 후순위였다. 세상 변하는 것은 알겠는데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것은 뻔했다. 한해 농사로는 필요한 돈을 조달하기 어려웠고 배를 타는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마저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컸다. 돈만이 아니라 권력도 그랬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만 뒀던 것이 아니란 얘기다. 힘이 계층을 만들었고, 남성 중심의 사고 방식이 차별을 키웠던 셈이다. 경제 구조상 현금을 쥘 수 있었던 여성을 누를 수 있었던 힘을 쉽게 놓을 리 없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탓에 아버지, 가장의 무게는 더 크고 무거웠다. 소 같고, 무쇠 같았던, 아니 같아야 했던 사정들을 어떻게 다 풀어낼 수 있을까.

그 시절 ‘나’의 기억에는 매년 신구간이면 이삿짐을 챙기느라 정신없었던 유년 시절과 ‘내 집’이 생겼다고 눈물을 흘리던 부모님이 있다. 꽤 오래 친정 안방에 한 자리를 차지하던 자개장이 있었고, 명절이나 제사 때면 학교가 가지 못하고 준비를 하던 내가 있다. 남에게 손 내밀지만 않으면 된다고 부지런히 살았던 부모님 덕분에 어린이집도 다니고, 학원 구경도 했으니 그나마 좀 살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엄마와 아빠는 엄청나게 아끼고 또 부지런히 사셨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아빠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엄마가 들려주는 아빠의 모습은 그래서 낯설다. 단편적이나마 생각나는 것은 주말까지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시던 아빠 심부름을 하며 요구르트를 얻어 먹었던 것 정도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좀 더 자란 뒤 기억하는 아빠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평생 딸을 짝사랑하는’순정남이자 든든한 뒷배다.

아빠의 첫 딸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을 끼고 살았던 아이를 누구보다 아끼셨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학년이 올라갈 때면 새 가방이 있었고, 곱게 싼 교과서와 반듯하게 깎은 연필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연필깎이가 등장하고 동생들 교과서를 내가 챙겨줄 즈음 어쩌면 아빠가 서운했을 거라는 걸 지금이야 느끼게 됐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아빠와 길을 걷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 재잘거리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잠깐을, 아주 나중에 ‘아빠의 흰 머리가 부끄러워서 두고 갔다’고 기억하고 계신 걸 알고 속이 상해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있었다. 한달에 한 번 서울 병원을 다니는 동안 옆을 지켜줄 시간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쓰셨던 것을 그 때는 정말 몰랐다.

동생들까지 대학 진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학원 진학 대신 취업을 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미안해 하시던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아빠 같은 여름, 여름 닮은 아빠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서덕준 <도둑이 든 여름>


그런 아빠의 존재가 내게는 ‘여름’이다. 초록이 더 빛날 수 있도록 한껏 힘을 실어주고 그늘의 이유를 알게 한. 지키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도 긴 해가 아쉽지 않고, 오히려 날 가는 것이 야속했던. 그 많은 대사들 중에 “하루 살면 하루 살 수 있는데 그 하루가 참 치사하네”에 꽂혀 엉엉 울었으니. 그렇게 며칠 아빠 앓이를 했다. “아빠 정말 폭싹 속으셨어요” 아마 이렇게 말하면 눈을 크게 뜨고 ‘혹시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부터 하셨을 나의 로맨스그레이. 정말 많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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