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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4.3 기억하기, 그리고 기록하기

by 고미
…저승차사들은 다시 찾아왔다. 싸락눈이 흩뿌리는 이른 아침, 난데없는 거친 군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어 젖혀졌다. 찬바람이 일시에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간난이를 지목하고 나오라고 했다. 간난이는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그 앞을 시어머니가 막고 서서 미친 듯이 허우적거렸다.

“우리 며누리 아무 죄도 없수다. 천부당만부당한 일, 사람 잘못 찾아왔수다. 죄라면 서방 잘못 만난 죄…… 아이고, 서방이 죽어 버렸는데, 또 무슨 죄가 남았수꽈? 기어이 데려갈 테면, 날 데려갑서. 그런 자식을 낳은 이 에미 죄가 더 크우다. 아이고, 제발 날 데려갑서.”

그러나 염라대왕의 명부에 이미 그녀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기상천외하게도 그것은 왜정 때 만들어진 경찰기록이었다. 칠팔 년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전 왜놈 조합서기들과 맞서 싸우다가 이십 일 구류 산 것이 기록에 올라 남편과 한통속의 사상불온자로 점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죄였다. 일제에 의해 불온분자라고 낙인찍힌 자는 해방된 땅에서도 여전히 불온분자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왜놈들한테 대항한 것이 칭찬받을 일이지, 왜 죄가 되느냐고, 간난이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그러나 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차디차게 비웃었다. 삼팔선이 그어진 때 우연히 이북에 놓여 스무 날 가량 머물렀던 것을 놓고, 나쁜 사상을 가지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오래 이북에 머물렀느냐는 것이었다. 삼팔선 넘을 때 조선인 통역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간난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이런 세상에 구차하게 목숨 붙여 살아 무엇 하랴. 간난이는 무서워 떨고 있는 어린 아들을 마지막으로 꼬옥 껴안아 주었다.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귀중한 일점 혈육……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이 에미는 이 세상 살 수 없어 저 세상 살러 간단다. 아가야, 부디 몸 성히 자라서 새 세상 보거라. 그리고는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저녁 무렵, 바닷가 눈 덮인 모래밭에서 간난이를 포함한 여덟 명의 우묵개 사람들이 일제히 불 뿜는 총구 앞에서 쓰러졌다. #현기영 #거룩한 생애_중



# 또 다시 '봄'에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2025년 봄, 4.3이 세상에 묻는다. 우리의 역사라고 했지만 왜 ‘역사‘에만 집중하는지를 넌지시 건드린다. 많이 아프지 않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통증이다. ’우리‘는.

일흔일곱번째 마디에 닿아 처음 나온 화두는 아니지만 우연처럼, 아니 운명인 듯 연결되는 것들에 생각이 많아진다.

제주 4·3의 참상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감독 지혜원, 프로듀서 김옥영)과 제주 KBS 4.3 특별 다큐 <경계인 미츠키>(연출 #양호근),제6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인 벨라루스 출신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7.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이르기 까지 하나같이 ’우리‘를 본다.

‘우리’에는 산자와 죽은자, 승자와 약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없다. 나눌 이유가 없어서다. 더듬어보면, 생각해보면…소설 속 간난이가 그랬던 것처럼 ‘귀신이 곡할‘사정들이 우리를 네편과 내편으로 쪼개서 ‘목소리’를 빼앗았다. 기억할 것을 가려냈다.



#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자 남성 중심으로 기억되며 살아남는 이들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봉인의 장치로 쓴다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 맞는 것도 아니다. 몰랐던 것도 아니어서 이제 들어내 소리 내는 것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단면이 아닌 온전한 ‘우리’의 역사를 이루는 것에 몸살을 앓는 듯 여기저기가 아프다.

분명한 것은 강자가 되어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껏 바라보던 것만이 아니라 찾아 살펴야할 것들이 아직 남아있음이다.

이전 증언본풀이나 여성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채록 작업이 오래 진행됐고, 밀항으로 고향과 조국을 떠난 뒤 경계에 남아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던 재일제주인 디아스포라도 이제 만들어진 사정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때를 기억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아이‘다.

최근 화제를 모은 ‘폭싹 속았수다‘에 왜 가장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그리 많은 지, 왜 그렇게 가족에 헌신적인지 한번 더 살펴봐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풋풋한 첫 키스의 추억이 흐드러진 그 유채꽃밭이 장장 7년 7개월 비극을 품은 현장일 수 있음을 상기한다.



#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지난해 가을 어느날의 묵직했던 감동을 아직 잊지 어렵다.

故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우리나라의 두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문학' 영역에서 나왔을 때의 일이다. 소설가 한강은 제주4.3, 광주5.18민주화운동 등 현대사의 아픔에 주목하고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아픔을 어루만지며 기억해야 할 역사를 각인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선정과 관련해 노벨재단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그녀의 강렬한 시적 산문.”(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이라고 그의 글을 평가 했다.




그녀의 작품 중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광주5.18민주화운동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4.3을 다룬 작품이다. 2023년 메디치상 외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고통의 지속성과 애도의 의미를 짚는다. 상실을 겪은 인간이 어떻게 삶을 회복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살피며 고통 속에서 찾아가는 치유의 과정에 주목한다. '새'로 시작한 여정은 상실과 고통의 시간인 '밤'을 지나 치유와 재생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가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녀의 인터뷰에서 종종 등장하는 이 질문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지만 특별한 로직을 작동시키는 주문이기도 한다. 인간으로 풀어낼 수 없는 비극과 그로 인한 상처들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유롭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슬픔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운명같은 고리가 한강 작가를 소환하게 한 데는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시선'에 있다. 살아남아야 했던 비자발적 약자, 오랜 강압 속에서도 기억을 놓지 않는 이들의 존재다.



# 땅에 묻지 마라, 명복을 빌지 마라


어느 한쪽 나라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그 중에는 그 어느 국적도 선택하지 않은 ’우리‘에게서 잊음과 잊힘의 상대성을 본다.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곧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고, 그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경험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집합적 기억은 단순한 애도나 존경의 감정만을 불러일 으키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은 오히려 불편한 감정, 즉 혐오와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물어보지 마라‘하고 입을 다물고 자신에게 흐르는 피를 부인한다.

“땅에 묻지 마라. 사람들아. 명복을 빌지 마라”

올해 96세, 그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시간을 사는 시인 김시종의 ‘저항’은 존엄, 존재와 연결된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는 걸 멈춰서는 안된다…는 여러 갈래 목소리가 포개지고 쌓이며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 #정명의 날까지


#제주4.3 #77주기 #7…7


#목소리들#경계인 미츠키 #김시종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생각해볼#우리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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