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 폭싹 속았수다>에 부쳐
‘폭싹 속았수다’의 스며듦은 <오징어게임>이나 <파친코> 등 먼저 인기작 대열에 오른 것들과는 다른 결이다. 단순한 콘텐츠를 넘어 K-컬쳐의 다양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로는 충분한 활약을 하고 있다. 적어도 오늘을 기준으로 앞 선 세대도, 다음 세대도 ‘그랬었지’ ‘그랬구나’할 수 있는 동기를 줬다는 것 만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시대상이나 가족애, 솔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의 감정 같은 것들이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진화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도 나름 흥미롭다. 이전 작품들에서 드라마 속 촬영지가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떠오르며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경험들 때문인지 ‘알고 보니 제주가 아닌’이란 촬영지 마케팅도 불이 붙었다.
봄, 여름, 가을 지나 겨울까지 마무리되면 보겠다거나 그 때 다시 할 말이 있다거나 하는 반응들도 있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어쩐지 매끈하니 알 것도 같은 표현에 대해 제주어 표기법에 의하면 쌍시옷 받침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폭삭 속앗수다‘ 또는 ’폭삭 속앗우다‘가 맞다’는 추가 설명과 드라마 속 등장인물 설정이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것에 대한 해명도 등장했다. 뭐가 됐든 아마도 그 잔향이 아주 오래 갈 것도 같다는 싶으면서도 그 안에서 더 뭔가 보고, 읽으면 좋을까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들을 겪고 또 경험했던 일들이 하나둘 들춰질 때마다 저절로 코끝이 찡해지는 걸 말로 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싶으면서도 그 안에 포개져 있는 소소한 것들을 찾아내며 뿌듯해하는 심정이라니.
‘소소한 것’이라고 하니 눈에 띄는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애순과 관식이 양배추와 생선을 팔던 시장 골목에서 국화빵을 팔던 한 할머니는 목에 ‘피란 실종 찾습니다’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전쟁의 상흔이 깊었던 1960년대 ‘평안도 진남포’에서 제주까지 쓸려 내려온 이들에게 가족을 찾을 방도라는 것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사연을 전하는 것 외에 더 있었을까.
6‧25전쟁 당시 제주 사정을 살펴보자. 비극적 상황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움직였던 이들에게 바다를 건널 계획 같은 건 없었다. 피란수도 부산마저 지키지 못할지 모른다는 급박한 상황에서 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 마주한 것은 4‧3으로 피붙이와 생업 수단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던 제주였다. 숨쉬는 것조차 퍽퍽했던 현실에서 누가 누구를 감싸고 달랠 수 있었을까.
심지어 다른 지역보다 복구가 더뎠던 제주 상황에서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은 동아줄을 잡는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깨로 걸었던’ 칠성통 엘리지의 토막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시절을 상징했던 다방 등등의 장치를 가볍게 넘기기 어려웠을 일이다.
고향 소식이 간절했던 피난민들과 살 방도를 찾으려는 이들이 엉키면서 ‘어깨로 걷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던 당시 칠성통의 다른 이름은 ‘다방 거리’였다.
1950년대 칠성통은 한 두집 걸러 ‘다방’간판이 있었다. 광복 후 제주 최초의 다방 ‘파리원’이 들어선 곳도,유명 잡화점 ‘갑자옥’이 자리했던 곳도 이곳이며,인쇄소의 효시인 제주인쇄소와 최초의 목욕탕인 일출목욕탕,최초의 사진관인 월광사,최초의 서점인 우생당도 이 곳 언저리에 터잡았다.
1947년 10월 7일 도내 처음 ‘다과점’ 허가를 받은 칠성다방이 개업했다. 6·25 피란민 속에 학자와 예술 문화인들이 섞여 들어오면 제주에도 순수 문학이나 미술 같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예술이나 해보자 했던 것이 아니라 모일 수 있는 곳에서 예술을 핑계 삼아 현실과 인생에 대한 생각을 비유적이거나 또는 서사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 일인 듯이 풀어냈다.
이후 길다방, 호수다방, 양지다방, 초원다방, 소라다방 등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1960년대 제주 시내에만 41곳, 1970년대는 90곳이 이른바 다방 영업을 했다. 그 중 대부분이 사람들이 들고 나는 칠성통을 중심으로 일종의 타운을 만들었다.
드라마 속 다방은 뭐랄까. 그런 느낌 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만남을 가졌던 몇 안 되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시대가 그랬으니 원도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런 공간이 귀했으리라.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던 목 좋은 곳에 그다음은 식당 간판이 걸리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런 키워드가 읽히는 포인트는 다름 아닌 ‘극장’이다. 청춘들의 해방구라고 해도 별 것 없던 시절이었다. 하필 영화다. 몸이 약했던 학창 시절 남들은 보충수업을 하는 그 시간을 요양 겸 휴식 겸 여유있게 썼던 내게 영화, 그리고 극장은 그리 많지 않은 감수성을 채워준 오아시스였다. 책만 파던 문학소녀에게 움직이는 그림이, 멋스러운 대화와 찌릿하고 가슴 떨리던 장면 장면은 말 그대로 엄청난 기운이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신문사에 입사해서 처음 쓴 기획 기사가 ‘마지막’ 영화 간판 화가였다. 제주에서 가장 먼저 멀티플렉스로 변화를 시도했던 코리아극장은 1960년대 제주 원도심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 비슷한 시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성업했던 동양‧제주‧중앙(아세아)‧현대극장이 다 문을 닫은 뒤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던 공간의 매력은 드라마 속 풍경과 거의 흡사한 매표소와 매점, 그리고 닮은 듯 안 닮은 듯 영화 속 대표 장면을 옮겨낸 간판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서울 등 대도시에는 실사 간판이 등장했던 무렵까지도 제주에는 간판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가 있었다. 말 그대로 한달이면 두어번 대형 화판에 페인트로 가지고 창작을 한다. 남다른 눈썰미와 경륜을 응축한, 영화 한 편을 다 본 듯했던 ‘봄날’같은 간판 그림의 제작 과정을 옆에서 볼 수 있었던 행운이 지금은 감사하기 까지 하다. 간판 그림의 역사도 멀티플랙스와 함께 사라졌다. 제주 영화사에 ‘엄두식’이란 이름 석자를 남길 수 있었던 데는 앞서 그가 채워넣었던 40여년의 시간이 있었다. 6·25전쟁 직후 영화 그림판에 뛰어들었던 그는 당시 햇수로만 47년, 서울에서 부산으로 진주로 또 마산으로 그렇게 극장을 따라 떠돌다 제주 극장가에서만 5년 여 영화간판 작업을 했다. 어지간한 배우의 특징을 꿰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글자나 색을 써야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줄줄 읊었다. 그의 기억을 따라 가다 보면 간판 크기가 흥행을 좌우했던 시절이 나온다. 페인트를 쓰기 전에는 물감을 사용하다 보니 비만 오면 간판이 줄줄 울었다. 간판부만 10명이 넘던 때도 있었다. 전부 과거형이다.
곤로에 굽던 오징어는 어느 순간 연탄불 위에 올라섰고 휴대용 부스터와 호흡을 맞췄다.
관식이 대학에 다니는 딸 금명을 보러 서울에 올라온 날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87년 12월 16일로 설정했다. 두 사람이 버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오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등장한다. 버스 터미널 대기실 TV에는 노태우 후보가 대선에서 1위로 앞서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온다.(실제로 당시 노태우 후보가 투표일 오후 11시부터 1위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을 경험한 애순의 "나중에 크면 대통령도 다섯 번 해 먹겠다"는 대사나 애순의 국민학생 시절 그러니까 1960년 초중만 반 아이들이 만기 아버지가 준 양초로 마룻바닥과 창문을 닦는 장면,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자개장을 집에 들이고 행복에 겨워하는 애순의 모습 등도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노스텔지어’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 소품인 바나나우유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랑하는 아내 애순의 어촌계장 당선을 위해 관식이 슬쩍 꺼낸 단맛이다. 바닷가 동네에서 짠 냄새와 짠 기운에 물든 이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바나나우유였을까.
2024년 언젠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도 국가유산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하나를 받았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공산품이 ‘국가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지를 놓고 관심있는 몇몇이 갑론을박을 했었다.
기준만 놓고 보면 조건은 충분하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은 ‘제작·형성된 지 50년이 경과한 문화유산 가운데 보존·활용 조치가 필요하다고 국가유산청이 판단한 근현대문화유산’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먼저 만들어진 지 50년이 지나야 하고, 역사·문화·예술·사회·경제·종교·생활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1974년 출시된 바나나맛 우유는 ‘기간 조건’을 맞췄고 드라마 속 소품으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니 풍미하고 있는 중이다. 이 진행형이 물음표를 만들었다.
공산품이 국가유산에 오른 사례는 이미 있다. 현대자동차의 첫 독자생산 자동차인 ‘포니’와 최초의 세탁기인 금성 세탁기 등이 국가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과 전자 산업 발전이라는 역사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는 의미와 산업 발전이라는 시대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난 50년 간 95억 개가 팔렸고, ‘바나나 우유’하면 달항아리 모양의 용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만 보면 유산적 가치가 충분하다 여겨지지만 아직도 공장에서 대량생산 중인 상품에 ‘국가가 보존해야 할’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맞는지에 대한 답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지는 지수다.
드라마와 연결해 생각해 보면 바나나맛 우유 용기의 생활사적 가치를 강조한 빙그레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단순해 보이지만 용기 모양을 만들기 위해 들였던 노력도 높게 살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둘 연결하고 다른과 다음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드라마 속 등장했던 대사 하나가 준비된 듯 스쳐 지나간다.
“사실 그게 뿌리 깊은 깡이잖아요”
세상을 흔드는 것은 많고 많지만 반짝이고 화려하고 거창한 것들은 꽁꽁 포장을 한 탓에 멀게 느껴지는 대신 손 가까이 마음 가까이 있던 것들은 슬쩍 본 것만으로도 롤러코스터급 감정 변화를 일으킨다. 그런 깡이라면, 매일 매시 매분 매초 만나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도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