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까닭없는 동화는 없다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루이스 세풀베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by 고미
내 세계는 침묵과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바다 밑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불평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투덜거리거나 악을 쓰지도 않는다. 몸집이 가장 큰 존재들만이 가끔 바다 밑의 정적을 깨뜨린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루이스 세풀베다


#접속사에 빠지다


그래서…

글을 깔끔하게 쓰고 싶다…고 하면서 못끊는 것이 다름아닌 ‘접속사’다. 설득이나 이해를 위한…같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개인적 취향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 중 좋아하는 접속사가 ‘그래서’와 ‘그런데‘다.

’그래서‘는 긴 여운을 담아, ‘그런데‘에는 ’…이게 뭐랄까’의 여지를 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래의 시선으로’ ’바다를 다시’라는 말에 끌려, 판타지 같은 느낌의 표지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 소설은 한 마리 향유고래의 이야기다. 거대한 몸집으로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 다녔던 이 고래에 대해 사람들은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했다…로 끝났다면 그저 포근한 블루의 소설로 마음이 차분해 졌다고 쓰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뭐랄까. 소설 속 그 고래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대한 몸집과 포악한 공격성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괴물’이다. 고래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래는 허술한 배로 거친 파도에 맞서는 인간의 용기에 감탄하고, 점차 지식을 쌓아 수평선을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을 지켜본다. “저기 고래가 나타났다!”는 외침이 터지기 전까지.


#고래가 나타났다, 그런데 뭐랄까


그렇게 고래가 바다에서 목격한 것은 “증오와 공포, 그리고 절망의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공격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고래는 말한다.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를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고.

인간들의 영웅 서사 속에 고래는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우리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다.


바다를 향한 인간의 폭력에 맞서 달빛 고래는 저 깊은 바다의 어두운 심연으로 내려가 힘을 얻고 끝까지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의 몸뚱이에 1백 개 이상의 작살을 꽂고도 만족해 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게 숨져간 달빛 고래야말로 괴물 인간을 대항해 싸운 바다와 고래의 빛나는 역사가 아닐까. 세풀베다는 ‘모차 딕’으로 불린 존재를, 바다와 자신들의 종족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충직한 전사로 그려낸다. 고래의 입을 빌려 고래가 본 인간의 세계, 그리고 인간에게서 배운 교훈은 탐욕, 잔혹함, 그리고 멸종을 향한 위험을 지적한다.


영화 ‘하트 오브 씨‘ 스틸 컷



#그러니 바로 보라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이 인간 세상에 울리고자 했던 경종은 ‘바로 보라‘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 이외의 생명체의 멸종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도 지구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문이기도 하다.


글만 따라 읽었다면 ‘지금까지 잘 몰랐던 잔혹 동화‘정도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글쓴 이의 여정을 따라가면 고래의 혹독한 삶이 다른 결로 읽힌다.

칠레 소수 민족 출신인 세풀베다는 그래서 평생 환경과 소수 민족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썼다.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살기 위하여 망명의 길을 택해야 했던 그가 다시 국적을 회복하기까지 68년이 걸렸다.


망명과 추방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잊지 않았던 그의 태도는 1백 개의 작살을 맞아가면서도 신화(라프켄체 부족에게 전해지는 이 세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트렘풀카웨)를 지켜내려 한 달빛고래의 운명과 닮아 있다. 달빛고래는 동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온몸, 온 마음으로 싸웠고 세풀베다는 잊히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땅, 언어, 기억을 지키기 위해 펜을 들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그 사명을 붙들었던 존재. 단순히 상징적인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고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 이중의 감각은 작가 자신이 세계에 남긴 자서전 같이 느껴진다.



# 고래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달빛고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뒤 그 의미를 스스로 갱신한다. 타인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을 넘어 바다에 침입한 인간 전체를 몰아내는 사명을 자처한다.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존재의 전환이다. 기억에서 저항으로, 슬픔에서 운명으로 옮겨가는 이 변화는 세플베다가 글을 통해 만들어낸 혁명가의 형상과도 겹친다.


동화지만 자연은 착하고 인간은 나쁘다는 단순한 이분법적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문명적 우월의 허위를 자연의 눈으로 폭로하는 방식은 뭐랄까 제대로 읽어야할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밤의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고래의 몸에서 기름을 짜 불을 밝히려는 인간. 이는 빛을 쫓기 위해 생명을 착취하는 문명의 자기모순이며 고래는 이를 관찰하고 견디다 결국 윤리적 반격을 한다.


동화라면서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뭉툭한 단어와 폭신한 수사 사이에서 둔한 통증을 축적한다. 전설과 설화, 그리고 고래가 하는 말들 사이에 끼워진 고요한 문장들 속에는 분노 대신 의지가 흐른다. 피맺히거나 날 선 어떤 장치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지워지지 않게 하는 작가의 호흡에 심장이 떨린다.

#그래서 고래, 노래하다


내 세계는 침묵과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 밑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불평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투덜거리거나 악을 쓰지도 않는다. 몸집이 가장 큰 존재들만이 가끔 바다 밑의 정적을 깨뜨린다. 향유고래종에 속하는 나는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대왕고래와 참거두고래는 한밤의 적막을 달래주는 일련의 화음창법 노랫소리를 통해 길을 찾아간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루이스 세풀베다


마치 고래의 노래처럼. 호흡을 맞춰야 들린다

고래의 노래는 지역마다 다르고, 시간이 지나며 변한다.

고래의 노래 속에서 방언(dialect)', 즉 고래 무리마다 다른 표현 방식도 있다.

심지어 남태평양에서 유행하던 한 노래가 몇 개월 만에 수천 km 떨어진 무리들에게까지 퍼진 ‘문화적 전파(cultural transmission)’사례도 있다. 마치 인간 사회의 그 것처럼, 흐르고 또 흐른다.

이쯤되면 달빛고래의 존재는 독재에, 환경을 파괴하는 자본의 구조에, 무엇보다도 기억을 잊는 세계에 맞섰던 세풀베가의 펜이라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닿으면 ‘아 꿈이 아니구나‘하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누구도 승자가 아닌, 아니 영웅일 수 없는 모험담이 남는다.


아픈 동화의 끝에 질문이 작살마냥 박혔다.

그래서…나는, 나의 고래는, 고래인 나는 어떤 세계를 짓고 있을까. 이 만큼도 힘든데 어떻게 더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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