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프로젝트 한달, 마리엔탈에서 로제타까지
So what, Why so…일을 하고 싶기는 한거야?So what, Why so…일을 하고 싶기는 한거야?
‘제주 이해’를 내건 프로젝트 한달. 준비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걱정에 부담까지 장난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 스스로에게 계속 ‘왜‘ ’그래서’ ‘그러니까‘를 반복하면 미션을 쌓기만 했다.
날 앞에 ‘마지막’이라고 쓰고 난 뒤로도 한 며칠 종이접기를 하듯 이리저리 아귀를 맞추고 빈틈을 포개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하게 된 것이 다름아닌 ‘양질’의 일자리. 취업 교육도, 창업 지원도 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나온 방법들인데 ’맞나?’에 걸린다.
연휴는 포기하고 주말 내내 끙끙거리며 자료를 뒤졌다. 내리 닷새를 월요일처럼 썼다. 그 사이 피로회복-몸살 치료-영양 보충 같은 다양(?)한 이유들로 허약하기 그지없는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았고, 슬픈 혈관통과 우울한 멍을 얻었다.
몇 번인가 무너질 것 같은 순간을 넘기고 그 때마다 사람에게 힘을 구했다. 잘 살았다고 숨 돌린 것도 잠시..휘청하고 아득하고..“나이 좀 생각하라”는 말에 아무런 타격감도 느끼지 않게 됐다. 맘 상할 틈이 없을 만큼 몸이 힘들었다. 그랬다.
넋두리를 걷어내고 마음 써 살폈던 현상에 집중한다. 세상에 나서는 각자의, 나름의 방법이 있을진 데 그 것이 어쩌다 이렇게 정형화가 되고 있는가. 큰 흐름은 별다른 도전을 하지 않지 않는 대신 경제적 대가가 후한 자리를 찾지 않으면 내 성에 차지 않으니 일단 대표 명함부터 만들겠다는 넘치는 도전 정신으로 나뉜다. 이것도 저것도 아직 내 것이 아닌 듯만 싶어서 일단 시간을 벌고 싶다는 마음이 그 사이에 흐른다. 10년도 더 전 대학마다 ‘졸업 유예’가 늘었다는 기사를 썼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든다. 그 때는 ‘창업’이란 선택지는 아주 후순위였다. 지금은 그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다’에서 시작한 나름 고민의 결과겠지만 슬프게도 일종의 양질 워싱이다. 양질의 기준이 연봉과 복지에 묶이며서 기업의 책임이 커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저런 기준을 충족하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보니 ‘그러니 더 노력해’하는 희망고문만 남는다. 창업은 더하다. 원하는 수준의 돈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지원사업이라는 것에 의지해 채우다 보면 돌고 돌아 창업형 열정페이로 마무리된다. “그래도 대표인데”로 만족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삶은 더 퍽퍽해지고 재미란 것을 잃게 된다.
일이 몰리면서 잠까지 줄이던 참에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인 이상헌님의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를 읽었다. 읽어야 했다. 시장의 논리와 인간의 존엄 사이에서 ‘삶의 의미로서의 일’을 재정의한다는 설명에 무작정 책을 펼쳤다는 말이 더 맞겠다. 책의 시작점은 ‘로제타’다. 영화 속 주인공이지만 오늘의 어딘가를 살고 있는 인물이다.
수습을 마치자마자 공장에서 해고된 로제타는 자격 요건이 되지 않아 실업 급여도 받지 못한다. 버려진 캠핑카에서 알코올 중독의 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는 유일한 구원인 일자리만을 기다린다. 밤마다 자장가 삼아 “내 이름은 로제타, 나는 일자리를 찾았어”라고 말하지만, 그 구원은 좀체 오지 않는다.
로제타가 필사적으로 직장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전투적인 행동에서 느껴진다. 그녀는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핸드헬드 기법으로 찍은 화면은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궁핍한 삶과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한 감정을 전달한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수시로 물을 마시고, 주운 옷가지를 헐값에 팔아 거리에서 와플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로제타에게 삶은 문득문득 그녀를 찾아와 괴롭히는 복통과 같다. 이 모든 불안을 안정시켜줄 일자리는 무지개처럼 잘 보이지도 않고 붙들 수도 없다.
이 영화는 199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지만 20년 만에 국내 개봉했다. 책은 단순한 영화 소개가 아니라 “로제타는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세상 어느 곳에나 성별이나 아이 구분없이 심지어 일터로 일정받지 못하는 집 안에도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제타는 일자리에서 밀려난 모든 사람을 부르는 보통 명사다”.
# '양질 = 좋은' 맞아?
그리고 다시 묻는다. “왜 일자리는 부족한가”가 아니라, “왜 좋은 일자리는 부족한가”를.
일자리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일자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즉 일자리란 사람이 가족, 친구, 공동체, 사회 등으로 형성된 물리적 공간을 기반으로 특정한 생산적 행위를 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자리의 ‘물리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나 도시에서 일자리가 없어지고 멀리 떨어진 도시에 생겨도 좀체 이동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Goldstein, 2017). 특히 지역 간 사회적· 문화적 격차가 클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변화 등으로 어느 도시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으면, 이 도시가 실업, 긴장, 폭력이 넘치는 폐허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즉 일자리의 양극화가 곧 지역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자리의 사회적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술적 충격으로 일자리 파괴가 일어나면 이를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겠지만, 해당 도시나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복지국가를 설계한 베버리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이 아니라 일자리가 기다려야 한다. Jobs, rather than men, should wait”(Beveridge, 1944). #이상헌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7장_기술 변화: 풍요와 그늘, 분화하는 일자리와 분열하는 일터_중
‘좋은’은 느끼기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다. 지난해부터 (예비)창업자들을 컨설팅하면서 “지금 하려고 하는, 하는 일은 ‘양질의 일자리’인가”를 묻곤 했다. 지원사업 특성상 ‘일자리 창출’과제가 꼬리를 무는 상황들에 나름의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양질의 일자리 대신 ‘만족도 높은’일자리로 동표 찾기를 목표로 설정하도록 했다. 그때마다 긍정의 끄덕임이 돌아온다.
# '삶'이란 단어가 공허해 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마을은 여전히 그때를 기억한다. 추억은 기억하되, 고통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실업자가 늘어나는 기미가 보이자, 마을은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보장하는 사업을 한시적으로 도입했다. 장기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8주 정도의 훈련 과정을 거친 뒤 민간 기업에 취직하거나 마을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도록 돕는 사업이다. 민간 기업에 취직하면 고용 보조금을 지급하는데, 어떤 경우든 월급은 최저임금 이상이 되도록 했다. 대부분 사회적 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강제성은 전혀 없다.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경우는 실업급여를 계속 받으면 된다. 일종의 일자리 보장 사업인데, 공식 명칭은 ‘마리엔탈 일자리 보장 시범사업’이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의지가 모두 잘 담긴 이름이다. 마을의 온갖 정책도 조율되어 이 사업을 지원한다. 일자리 만들자고 온 마을이 소매 걷고 나선 것이다.
일자리 보장 사업을 총괄하는 사무실은 옛 섬유공장의 터에 자리 잡았다. 역사와 경험이 그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 사업을 벌인 장본인인 마을 시장은 마리엔탈의 역사적 경험에 관해 석사 논문을 쓴 사람이다. 그의 말은 거침없다. “당신도 애덤 스미스는 알겠지. 그 양반은 언제나 시장(market)이 옳다고 했단 말이야. 일자리가 없으면 돈을 덜 받고 일하면 된다고 하겠지만, 완전히 틀린 소리야. (…)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무슨 소리인지.” 스미스로서는 이런 오해에 다소 억울할 수 있겠으나, 마을 시장의 의지는 그만큼 굳건하다. 이 마을의 야심 찬 사업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 속담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어느 작은 마을 마리엔탈에서는 아이 키우듯 일자리를 키우고 있다. #이상헌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9장_일하는 삶에 투자하는 사회_ 중
핑계에 예전 읽었던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사라진 일자리와 파괴된 공동체에 관한 사회지학>을 눈이 시려 더 살피지 못하게 될 때까지 팠다. 한 번 꽂히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쁜 습관의 발동 덕에 마리엔탈의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책은 선험적 예단과 주관적 기술을 배제한 채 특정한 공동체를 살피는 사회지학(Sociography)이라는 방법론을 써, 앙상한 공식 통계와 우연적 인상에 바탕 한 문학적 신문 기사가 놓친 일자리 잃은 노동자의 삶을 직조했다.
정리하자면 ‘실업은 영혼을 잠식’했다. 기대감과 활동의 위축, 시간 감각의 붕괴, 폭넓은 무기력 상태 등으로 요약되는 ‘사회적 인성 구조의 붕괴’가 일어났다. 일자리를 잃고 우리 식구 밥벌이는 내가 한다는 자존감이 무너지며 삶이란 단어가 텅 비게 된다.(이런 느낌이다)
마리엔탈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언뜻 보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기본적 태도는 처음 두 가구의 기록을 통해 설명된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무심하게 별 기대도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사는 태도 말이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그래도 조용한 분위기이고, 가끔 평온하고 즐거운 순간도 찾아온다. 그렇지만 이 가족들의 머릿속이나 심지어 꿈에서도 미래란 계획의 형태나마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체념이 적합하다. (중략) 이런 삶의 태도를 특징짓는 줄어든 욕구와 기대의 부재를 더 잘 묘사하는 단어는 없다.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사라진 일자리와 파괴된 공동체에 관한 사회지학_중
실업자는 하루가 13.5시간인 반면 노동자는 17시간이다. 실업자는 강제로 더 긴 여가 시간을 떠안지만, 노동자가 8시간 근무를 마친 뒤 즐기는 여가 시간은 꼼꼼히 싸여 있으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활동적이다.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사라진 일자리와 파괴된 공동체에 관한 사회지학_중
# '내 삶을 지키는' 일에 대한 접근
물론 유일한 실질적 해법은 일터 복귀다. 지역 어디서든 제대로 된 공장 일자리가 생기자마자 사람이 충원된다.
터무니없이 임금이 낮은데도 마리엔탈 노동자들은 종종 몇 시간이고 걸어서 지역에 있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고, 먹거리를 받는 대가로 지역 농가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이런 잡일은 보통 실업급여 수급 자격이 만료되거나 애당초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듯하다. 공정성에 관한 의식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실업급여보다 많지 않은 소득은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실업급여에 관련된 질문에 정확한 답을 얻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추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이라도 사람들은 우르르 달려든다.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사라진 일자리와 파괴된 공동체에 관한 사회지학_중
실업자들은 생활에 관련된 요구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으며, 여전히 참여하는 행사와 단체도 축소되는 중이다. 그나마 남은 에너지는 이렇게 좁아진 생활 영역을 지키는 데 온통 집중된다. 우리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이 무너지며 하루가 지나가는 데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의 가치가 사라지는 모습 속에서 이런 축소 과정에 특유한 조짐을 발견했다. 오직 개인적 관계만이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네 가지 기본적 태도를 구분했다. 가장 우세한 태도는 체념이고, 좀더 활동적인 태도는 온전이라고 지칭했으며, 사람을 무너트리는 형태에는 절망과 냉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이 과정의 마지막에는 파멸과 절망이 자리한다.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사라진 일자리와 파괴된 공동체에 관한 사회지학_중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정의는 각각의 경험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외부적 요인으로 여러번 위기를 겪었던 내게 좋은 일자리는 ‘제때 정해진 월급이 나오고, 약간의 인센티브로 흥이 나는’것이다. 그것을 내 아이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일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은 ‘바쁘고 힘들고 퍽퍽하고’가 8할이다. ‘뭐가 되도 좋으니 일이란 걸 했으면 좋겠다’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팬데믹과 일자리 소멸의 시대에는 어정쩡한 ‘기본 소득’보다 ‘기본 노동’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 끌리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