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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다독이는 '색'있는 시간, '책'읽는 짬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두 권의 책과 동한두기 마실

by 고미

# 눈 안으로 밀물을 밀어넣다


순식간이었다. 마치 밀물이 들어오는 것처럼 알아채지 못한 사이 일에 잠겼다. 밀려오는 일들을 급하게 쳐내듯 해나가다 보니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피로감만 묵직해졌다. 분명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쪼개는 일에 공들여 힘을 쓰는 나를 본다. 환절기 계절병인 듯 몸살이 스치는 걸 알았지만 쉴 수도 없었다. 열흘 가까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럴수록 한껏 각성된 감각이 일어나 잠을 밀어낸다. 간신히 몸을 움직이지만 오후 서너시가 되면 버티고 있던 모든 것들이 발 아래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에 무너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분명 할 일이 있었지만 잠깐 마실이라도 다녀오라는 조언에 움직였다. 신기한 일이다. 마침 멀리 하늘색이 고왔고, 한 조각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멀리 갈 생각은 아예 없었던 터라 일하는 공간 근처 가까운 바다로 움직였다. 종종 생각을 정리하러 가는 평범하다 못해 밋밋한 작은 해안도로다.

연휴에 날까지 좋아서 차 세울 자리를 찾는 것부터 일이었다. ‘그냥 돌아갈까’하는 마음을 하늘이 자꾸 붙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의 토막


‘읽어야겠다’며 막무가내 들고 다니던 두 권의 책이 어슷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쯤 됐으며 한 두장은 읽어줘야지 않냐고 눈도 흘긴다. 그까짓 것 했지만 이내 한숨이 나온다. 여유를 잃은 탓이다. 책을 손에 들고도 머리 속으로는 ‘결과보고서가 어쩌고’ ‘상권 분석이 저쩌고’하는 생각들이 파닥거린다. 토요일에 맞춰 병원 스케줄을 몰아 넣고 밀린 집안일도 좀 할 계획이었던 것도 생각났다. 병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쳤던 것이 기억났다.

버트런드 러셀의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가 퉁하고 어깨를 쳤다.

책은 빠르게 판단하고, 강하게 반응하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그 안에 있는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은 자취를 감추고 없어진다는 사실을 건드린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보다, 이미 정해진 입장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다수가 말하는 목소리에 자신의 언어를 섞으며, 감정이 높은 쪽에 편승해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질문은 사라지고 확신만이 남고, 관찰은 사라지고 반응만이 넘치며, 복잡한 맥락은 지워지고 단순한 구도가 진실처럼 유통되는 시대에 우리는 사유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대신, 반응하는 인간으로 훈련되어 간다. 빠른 결정, 강한 입장, 명확한 해답만이 의미 있는 것처럼 여겨지며 사람들은 묻기를 멈추고, 관찰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느린 생각을 뒤로 미룬다.

갑자기 왜 이 생각에 빠졌는가 했더니 아침 일찍 최근 맡은 프로젝트와 관련한 연락을 받고 급하게 상의했던 것이 기억났다. 서둘러 일정을 마치고 노트북 앞에 앉은 이유였다.

중요한 작업을 할 때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어느 정도는 고립되어야 한다. 동시대 대중의 찬사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은 신학적 믿음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고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_중


#박준의 감수성이 필요했던 이유


박준 시인의 <계절 산문>는 그랬던 사이의 짧은 마실 같은 기운으로 포개졌다. 해안도로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슬로모션 같지만 빠르고 단호하다. 잠깐이라도 눈을 놓치면 잃어버릴 것 같은 것들 앞에서 숨만 가빠진다. 그런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가볍게’하면서 골랐던 책이었다. 윤회하듯 반복되는 ‘계절’에 삶의 기억과 감정을 차곡차곡 채워 넣어 그립거나 그리워질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힘에 생각을 딱딱하게 하는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올해 유난히‘그래서 언제 와’ 했던, 느릿느릿 다가온 봄처럼,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스며든다.

여리고 순하고 정한 것들과 함께입니다. 살랑인다 일렁인다 조심스럽다라고도 할 수도 있고 나른하다 스멀거리다라는 말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저물기도 하고 흩날리기도 하다가도 슬며시 어딘가에 기대는 순간이 있고 이내 가지런하게 수놓이기도 합니다.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잡으면 놓칠게 분명한 것입니다. 따뜻하고 느지막하고 아릿하면서도 아득한 것입니다.
#박준 #계절산문 #봄의 스무고개_중


그래서, 두 권 다 ‘잘 읽었는가’ 묻는다면 ‘다 못 읽었다’고 답한다. 사실이다. 잠깐 읽다가 책상 한 쪽에 밀어뒀다. 역시 ‘해야 할 일’의 힘이 가장 컸다. 한동안은 이길 재간이 없을 예정이다.

다만 오늘은 참 고왔던 저녁 하늘 덕에 짬을 낸 것으로,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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