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옛 명승호텔 그리고, 현 갤러리 레미콘
기형도 시인의 ‘빈집’을 꺼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첫 문장 첫 단어를 사람으로 바꿔본다.
‘사람을 잃고 나는 쓰네’ 슬그머니 화자가 바뀐다.
집..공간의 눈으로 현재를 본다.
글자가, 행간이 묘하게 엉킨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아하 이 절묘함이라니…
낡았다…는 것은 그립거나 또는 아픈 말이다. 정 붙였던 오래된 것…이거나 아니면 그만 잊혀진 것들. 제주 첫 현대식 호텔이었던 옛 명승호텔은 후자에 가깝다.
제주에 1946년부터 민간 항공기가 뜨고 내렸지만, 꽤 오랜 시간 관문 역할을 했던 것은 제주항이었다.
제주항과 멀지 않은 곳, 낯선 기운이 쉴 새 없이 오고 가면서 그들만의 호흡을 뿜어댔고 해가 지기가 무섭게 골목 안쪽으로 하나둘 붉은 등이 고개를 들었던 곳에 1962년 3월 특별한 공간 하나가 문을 열었다. 호텔이란 이름을 썼다.
제주 호텔사(史)의 공식 기록을 보면 1963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제주에 현대식 호텔 건립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하면서 제주 최초의 민간 자본 호텔인 제주관광호텔(현 하니크라운호텔)이 문을 열었다.
호텔이란 이름만 놓고 보면 아리송하기만 한 ‘첫’이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일반 호텔과 관광호텔의 차이(관광진흥법 상) 정도는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흔치 않은 현대식 건물의 1층은 마치 ‘사랑방’처럼 이용됐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라디오 한 대 보기 힘들었던 시절, 귀하디 귀한 TV가 설치돼 ‘대한뉘우스’며 재치문답 같은 프로그램을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국제공항이 자리를 잡고 1970·80년대 이른바 관광 붐이 일면서 도내 관광 서비스 인프라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하루가 멀하다고 ‘예스런’이미지로 밀리던 명승호텔은 1990년대 끝내 문을 닫았다. 언젠가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달리 원도심 쇠락과 함께 별다른 쓰임을 찾지 못하다가 현재까지 유휴공간으로 남게 됐다.
그렇게 ‘사람’을 잃었던 공간에 사람이 들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이란 이름의 문화예술 수혈이 일단 멎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급하게 숨을 돌렸다는 곳을 찾았다.
낯익은 작가들의 이름을 먼저 봤지만 이내 공간이 빚어내는 후광에 가린다.
애잔하다 못해 애절한 반도네온의 음색이 벽에서 바닥에서 천장에서 스며 나온다. 저절로 발이 움직인다. 흐느적 흐느적. 정신을 차릴 수 없다. Astor Piazzolla의 ‘Obilivion’. 당장이라도 멎을 듯 끊어지던 숨이 후하는 소리에 맞춰 머리를 친다. 탱고하면 흔히 떠오르는 거칠고 열정에 찬 느낌 보다는 오래 기다린 탓에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불안해 하며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예상치 못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공간감을 잃었다. 아니 시간을 놓쳤다.
오래 비어있던 탓에, 사람을 잃었던 탓에 공간은 너무도 쉽게 낡았다.
전시를 위해 예전 객실이며 여러 용도로 쓰이던 흔적은 사라지고 옹벽이 지지대 역할을 하며 시간을 얘기한다. 어딘지 아쉬운 느낌이다. 남아있는 것들도 지켜야 겠다는 마음보다 뭐라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들로 점철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만 일찍... '이럴줄 알았더라면' 말 한마디에 뭔가 받았다 뺏긴 것 같은 상실감이 든다. 그냥 후회다.
얼마 없어 사리질 옛 것들이 오늘도, 지금도 여전히 낡아간다. 폴싹하고 피어오르는 먼지도, 누군가의 꿈을 대신 했던 스티커 자국도, 허물어진 채 채워지지 않는 상처들도.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곳에서 보낸 시간도 그렇게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