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탐라순력을 거니는 시간展
우연히 알게 된 사실-중학생 대상 수업은 ‘힘들다’는 몇몇의 거절이 있었다-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림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 읽는 걸 좋아하게 된 이유가 기세 좋게 고개를 들었다. ‘기억하지?’…응 기억해, 기억하고 말고.
“제가요?”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북콘서트 제안을 받았다. 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반문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책이란 걸 썼던 게 100만 년(?)은 더 된 일인 듯 아득했다. 몇 년을 고생했던 작업은 제대로 소리도 내보지 못하고 추억이 됐다. 몇 번인가 다시 꺼낼 기회가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 내게 이런 기회라니.
우연히 알게 된 사실-중학생 대상 수업은 ‘힘들다’는 몇몇의 거절이 있었다-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림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 읽는 걸 좋아하게 된 이유가 기세 좋게 고개를 들었다. ‘나 기억하지?’…응 기억해, 기억하고 말고.
‘책 좀 써 본’은 늘 무거운 짐이었다. 일하느라, 아이를 키우느라, 마음을 내려놓느라 몇 년의 시간을 쏟았다. 그마저도 ‘네 일’이 아니라는 질책으로 드러내 내 것이라 말하지 못했던 우여곡절까지 있었다.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책을 쓰는 과정에서 느꼈던 것, 미술이란 장르를 통해 ‘오늘’을 보는 방법을 얘기해 주기로 했다. *튜브처럼 자극적인 무엇은 없지만 익숙하지만 몰랐던 것들을 귀띔해 주는, 일종의 재연 프로그램 콘셉트를 빌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제주도민 투표로 결정된 ‘제주 10대 문화 상징’으로 시작했다. 마침 책이 제주를 품고 작품으로 풀어낸 제주 지역 예술가에 대한 얘기여서 ‘딸기에는 우유’하는 정도의 쿵짝이 맞았다.
그 중 해녀 얘기를 하며 꺼낸 것이 탐라 순력도였다.
1703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기획'으로 화공 김남길이 그렸다는 기록화첩인 '탐라순력도'는 당시 제주의 자연과 풍경은 물론이고 그림 안의 사람들을 통해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물(652-6호)로 지정됐다.
1702년 가을 순력과 제주에서 치러진 다양한 행사를 그림 41면과 서문 2면 등 총 43면에 담았다. 그림 41면은 순력 행사 장면을 담은 그림 28면, 행사 장면을 담은 11면, 제주도와 주변 도서 지도인 ‘한라장촉’, 후에 추가한 ‘호연금서’1면이다.
제주목사 관점이라 그런가 평면의 화면이지만 제법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찾아보니 한양에 있는 임금이 내려다 보는 방향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 있다. 제주의 오름과 마을 이름을 비롯하여 방어시설의 위치 등을 자세히 기록했는가 하면 관아 건물의 위치도 상세하게 표현했다. 군사의 수, 가옥의 수, 논과 밭, 창고의 곡식과 제기, 서책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수를 표기했다 하니 군사와 행정 등 관리를 위한 목적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심지어 진상을 위해 선택받은 말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도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목적은 분명했다. 당시 제주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제주시 용연에서 뱃놀이를 하는 모습을 그린 ‘병담범주’에 해녀가 등장한다. 뱃놀이 현장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해녀들이 물질을 한다. ‘잠녀潛女’라고 표기까지 되어 있다. 그 때도 흔치 않은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그림을 풀어 보면 양반들은 유흥을 즐기고 있지만 정작 제주 사람들은 힘겹게 삶을 유지하는 현실이다. 테왁에 의지해 생업에 몰두한 해녀들에게 같은 바다 위로 전해지는 웃음 소리며 장구 장단이 흥겨웠을 리 없다.
그 기분까지는 모르겠지만, 화공이 붓으로 기록해준 덕분에 당시 해녀가 있었고, 그런 사정이 있었음을 알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1시간 여 부지런히 떠들어댄 탓에 기진맥진 기댈 의자를 찾는데 학생 여러 명이 찾아왔다. “팬이 됐어요”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됐어요”한다.
아하..이리 고마울 수가..
2021년 12월 한달을 채워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갤러리 벵디왓에서 ‘탐라순력을 거니는 시간’이라는 초대전이 열렸다. 판화와 한국화를 전공한 홍진숙 작가가 2016년부터 최근까지 제주의 옛 3성 9진 등 그림 속 현장을 직접 찾아 살며 작업한 결과물들이다.
작가가 설정해 놓은 동선과 관계없이 눈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버릇이 어김없이 작동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이 ‘해녀’를 담은 연작이었다. 탐라순력도 속에서 눈여겨 봤던 것들이 오늘이란 옷을 입고 나왔다.
물소중이 정도나 걸쳤던 병담범주 속 해녀와 달리 홍진숙 작가가 옮겨온 해녀들은 검은 고무옷을 입고 있다. 진상할 전복을 채취하느라 매일이 고됐던 그 때와 달리 고래와 바다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기까지 하다. 한참을 작품 앞을 서성이다 홍진숙 작가와 눈이 맞았다.
작품과 관련한 얘기를 차곡차곡 들었다. 몇 번인가 살피는 동안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생겼다는 얘기며, 흔적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사람 사는’의 영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 자신의 옛 기억을 더듬어 빚어낸 감성의 결과물 얘기까지 변한 것이 아니라 채워진 시간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300년 전 김남길이란 화공이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그린 것들이 그 때를 기억하는 장치가 됐으니, 홍진숙 작가가 지금 한 작업은 다시 300년 후 아니 굳이 300년까지 기다리지 않더라고 ‘오늘’을 살피는 창이 되지 않을까. 익숙하다는 녹색창을 뒤지고, G로 시작하는 어떤 것을 두드리고, 입맛대로 정보를 던지는 *튜브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홍진숙 작가는 제주 대표 여성 중견화가다. 1982년부터 단체전 및 개인전을 180회 이상 진행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서귀포시 기당미술관, 제주KBS 등에 소장돼 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한국목판화협회, 제주판화가협회, 창작공동체우리, 에뜨왈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