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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Feb 12. 2022

살아 온, 살고 있는, 살아갈 것을 ‘잇다’ 또 ‘엮다

그냥 제주 살아요-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와 박물관, 동행’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김영하 ‘읽다’중)”      

    

소설을 읽는 일만 그럴까. 박물관의 경험은 보다 농밀하고 진득한 겹을 만든다. 마치 원형질을 둘러싼 세포막과 같은 느낌이다. 지킴과 받아들임의 역할 모두를 수용한다.

새로운 도시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곳의 박물관을 일부러 찾곤 한다. 박제화한 것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앞지를 때도 있지만 많은 부분 박물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무는, 꽤 괜찮은 경험을 한다.

종종 아득하게 현기증이 날 때가 있다. 마치 느닷없이 찾아오는 부유(Floating) 불안 같은 느낌이다. 발바닥이 땅을 떠난 뒤 슬그머니 몸과 정신을 장악하는 혼돈, 나름 편한 컨디션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오는 어지럼증은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아직 진화가 덜 된 탓에 우당탕 발을 구르며 덤벼드는 수천, 수만의 시간은 과호흡과 둔한 두통을 동반한다. 오래 머물며 숨을 고르며 미친 듯 달리는 심박수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 다음은 느껴지는 그대로에 맡긴다.          

예르미타시 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대영박물관 등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으로 역사와 소장품 규모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뭔가 아쉬운 것은 '러시아'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 힘을 앞세워 주변국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챙긴 전리품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것도 모자라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된 외형만으로도 충분히 주눅 들만하다.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 있는 박물관의 이름은 사실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에르미타시'(은둔지, 인적이 없는 방)이다. 아픔도 있었다. 니콜라이 1세 때는 1000점이 넘는 작품이 경매에 나오기도 했고, 사회주의 혁명 당시에는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쓰였다.

심지어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는 수집품 중 상당수를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내줘야 했다. 그럼에도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있다. 러시아 외에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도 확보하고 있다. 존재 자체로 세계가, 역사가, 흐름이 된다.

제주라는 박물관도 이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 오히려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풍성하다. 

제주를 흔히 박물관·미술관 천국이라고 한다. 인구 대비 박물관·미술관 등록 숫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다는 점 때문이다. 이유는 이 것 말고도 더 있다. 관광지 특성으로 박물관·미술관이 많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제주는 있는 그대로도 하나의 박물관이다.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연사와 민속이 어우러져 하나를 이룬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자연사만 놓고 본다고 해도 화산섬이란 특징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 세 분야에 이름을 올렸다. 제주 땅에 발을 딛고 걸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자연사관을 도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가 있다. 심지어 4면에 해양생태관을 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역사도 빠지지 않는다. 신화·전설은 일단 접어두고라도 서기 200년부터 1105년까지 1000여년간 제주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체 '탐라(耽羅)'는 대외 교역으로 해양 영토를 확장했던 신선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증거도 있다. 탐라 중심 마을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제주시 용담동 마을유적(사적 제522호)과 용담동 무덤유적에는 우리나라 남해안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과의 대외교역으로 들어온 각종 금속품, 회색토기, 장식품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바다 건너 중국, 일본 등과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기록도 있다. 항해술이 북유럽 바이킹들만의 몫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별을 읽을 줄 알았고 수렵에서 농경으로 문화 전이를 이뤘던 과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 과연 몇 곳이나 될까. 

탐라국 탄생역사의 시작과 중심에 있는 '혈(穴)'이라는 공간, 거석 문화라는 연결고리 등은 제주를 박물관으로 읽기에 충분한 요건들이다. 신화의 현장들이 생경하게 남아있음은 그리스·로마신화와 견줘 밀리지 않는다.

제주해녀로 남은 수렵 이전 채집 문화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국립제주박물관이 진행한 ‘제주와 박물관, 동행’(2021.11.26 ~ 2022.02.06.)도 이를 증명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지난 2021년 11월 새로 꾸린 복합문화전시관을 일반 공개했다. 2018년 5월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11월 시작한 증축 공사는 2021년 2월 마무리됐다. 이후 8월 건축물 사용 승인을 받았고 이후 일반 공개를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일반공개를 통해 자랑하려는 것은 물론 그냥 보는 것 만으로도 ‘우와’소리가 나는 실감영상실과 현대식으로 꾸려진 대형 공간이다.

그래도 기획 특별전에 마음이 가는 것 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기획전시실 안 가득 제주와 사람 사는 이야기가 넘친다. 한참을 들여다보고도 발을 돌려 다시 보고, 또 살피고를 수 차례. 전시물 보호를 위해 설치한 유리벽에 찍힌 얼굴 자국에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마침표를 찍었다.     

‘잇다’와 ‘엮다’를 주제어로 국립제주박물관의 20년과 제주에 자리를 잡은 16개 공‧사립 박물관 및 미술관이 아낌없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공간에 발을 내딛는 순간 평소의 두 세 배가 넘는 중력이 온몸을 장악한다. 시간이 느려진다. 과학 지식이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중력이 강하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시공간의 곡률이 더 많이 생기게 되고, 시공간의 곡률이 더 많이 생길수록 중력이 강해진다. 그리고 중력이 강해지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시간 또한,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20년이란 시간을 한 호흡에 담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공간은 개관 준비를 하는 학예연구실장의 책상에서 시작해 지난 20년 박물관 모습과 특별전 포스터,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한 화면으로 시간 개념을 허문다. ‘사람’과 ‘소장품’이란 동력이 흐름을 이끈다. 국립제주박물관 최초의 발굴조사인 귀덕리 유적 출토품과 50명이 넘는 모든 기증자의 기증품, 박물관이 활용할 수 있도록 기탁한 문화재까지 총 95점이 고고한 기운을 뿜어낸다.

“나는 옛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더 잊혀지기 전에 남겨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모은 옛 물건들이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박물관에서 그 의미가 더해질 것이라 바라본다”했던 한 기증자들의 바람은 고요하면서도 강렬하다.

     

그리고 엮어낸 것들은 제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다릴 미래로 함축됐다. 국립제주박물관은 20년 동안 고고‧역사 박물관으로서 정체성을 지켜왔다. 그것만으로는 제주를 말 할 수 없다. 제주에서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이야기들이 모여야 비로소 ‘제주’라는 호흡을 뱉을 수 있다. 그래서 공간에는 제주사람들의 보통 일상, 제주를 사랑한 예술가들이 그려낸 제주 등 경계를 넘어 제주로 만난 것들이 동행했다.

박물관은 왜 갈까 하는 질문의 답은 하나일 리 없다.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박물관은 영원한 삶의 증거다. ㈔제주도박물관협의회 회원관과 제주도 공‧사립 박물관 및 미술관 16개 기관의 소장품 31점이 증명하는 것들은 그 자체가 완성형이면서도 아직 다 채워지지 않는 직소퍼즐의 한 조각 마냥 애틋하다.

하나하나 따져보고 헤아려보면 결국 우주 자연의 모든 것이 맞물려 균형을 이룬다는 이치에 닿는다. 지속성이 있는 것은 모두 맞물려 균형을 이루는 것들이고, 지속성이 없는 것은 맞물리지 않아 치우친 것들이다. 그 나름대로 이유나 의미가 있다. 그렇게 지속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맞물려 균형을 이루는 것과 맞물리지 않아 치우친 것의 아귀가 맞아 원을 이룬다. 그러니 돌고 돌아도, 한참을 머물러도 시작과 끝을 찾지 못한다.

최초로 일반 공개되는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개인소장 기탁품)’과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국가민속문화재, 국립제주대학교박물관 소장품)’도 좋았지만 많은 이들이 이중섭 화백의 은지화 ‘포옹’ 앞을 지켰다.

UN원조 밀가루 포대로 만든 물소중이와 물적삼, 머리수건(해녀박물관 소장품)이 힘든 시기에도 생계를 위해 생업을 붙들었던 제주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 제주를 대표하는 고 변시지 화백의 ‘풍파’와 제주 출신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한 이왈종 화백의 ‘제주 생활의 중도’, 고 김영갑 사진가의 ‘무제’, 고 김창렬 화백의 ‘회귀’가 섬, 그리고 섬을 둘러싼 흐름과 함께 한다. 모아 봐도 이렇게 좋은 것을, 각각의 매력을 나눠 보면 오죽하랴. 올해 해 볼 일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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