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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r 08. 2022

돌아올 날은 더 좋은 날이 될 거라는 ‘빚’

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시민회관

     

"세상이 바뀌어도 여기는 '시민회관 입구'입니다. 제주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억의 기준이죠"
2014년의 일이다. 원도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기록하는 기획을 진행하면서 제주시민회관 입구 시민필방 지기를 만났다.

시간이 흘러 지금도 그 자리, 같은 간판이다. 37년째 종이와 붓과 먹을 판다. 연필로 종이에 손글씨를 쓰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지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오래된, 뒤쳐진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민필방 지기는 붓 하나, 종이 하나의 특성을 살피고 오랜 단골의 기호를 놓치지 않았다. 기억 속 초등학생들이 어느새 자라 꼭 그 시절 자기를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물을 때의 감정에는 저절로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그래서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그 제주시민회관이 먼저 떠난다.

      
제주시민회관 행사에 참석한 연예인을 보러 모인 시민들(사진 위 1972년) 철거 전 마지막 전시행사인 걷고싶은 도시공간 만들기가 진행중인 제주시민회관(2022)

#반백년 이상 나이를 먹고  


1964년 7월 개관한 제주시민회관은 일반적인 기념행사에서부터 정치·문화·예술의 중심으로 적어도 이미 반백년 이상의 나이를 먹었다.

감성팔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주에서 태어난 40대 이상에게 '시민회관'과 관련한 기억이 하나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도 떠나는 그 발목을 잡지 못한다.

제주시민회관은 정부와 제주도가 '관광 제주'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열을 올리던 시기에 탄생했다. 제주란 이름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던, 거꾸로 말하면 섬 밖 문명이 정신없이 밀려들던 시절이었다.

1961년 태평양지역관광협회(PATA)총회에서 제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매력적인 관광지로 소개됐다.  1950년대 연간 5000명도 안되던 내도 관광객은 1961년 1만1178명으로 늘었다. 1963년엔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제주와 부산을 잇는 정기여객선 도라지호가 취항한다. 같은 해 제주도를 일일 생활권으로 바꿔놓은 제주~서귀포간 제1횡단도로가 개통된다. 제주 최초의 관광호텔인 제주관광호텔도 지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뭔가 큰 일이 있을 때면 없는 것, 빈 것, 아쉬운 것이 먼저 눈에 띈다. 그래서 서둘러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하게 된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숙원 사업’이란 탄생 비화는 제주시민회관도 가지고 있다.

제주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 남문로 옛 오일장 터에 당시 1646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제주 첫 철골구조 건축물로 자리를 잡았다. 부지 3096㎡에 지상 3층, 연건축 면적 1만2500여㎡ 규모에 최대 2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건물은 연극·영화만이 아니라 실내 체육장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당시 드물었던 '수세식 변소'를 갖췄다는 것도 뉴스였다.

1964년 7월 3일, 첫 삽을 뜬 지 1년여만에 모습을 드러낸 낯선 회색 건물을 보기 위해 시민 1000명이 몰렸다고 한다. 대한 늬우스에서나 봤던 장면이 자료로 남아있다. 개관 이래 교양강좌, 세미나, 공연, 학생예술제 장소는 물론 탁구, 태권도, 배드민턴을 할 수 있는 체육시설로 쓰였다. 1988년 제주도문예회관 등 문화 인프라가 하나둘 갖춰지면서 제주시민회관 이용객이 크게 줄었지만 그 존재감과 상징성은 여전해 보인다.   

1965년 제주시민회관 현판식 모습


# 지긋지긋한 '첫'의 기록


‘첫’이란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공간이기도 했다.

고향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준비한 무용과 소인극이 제주시민회관 무대를 처음 밟은 공연으로 기록된다.

반세기 탐라문화제의 전신인 제주예술제와 한라문화제의 음악제, 민속예술제 등 제주지역 문화행사는 물론 뭍나들이가 어려웠던 제주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을 초청 공연 장소로 섭외 1순위였다.

제주시립합주단 창단 연주(1985년 3월)·제주시립합창단이 창단 기념 연주(1985년 4월)를 가졌다. 1987년 4월 제주시립교향악단이 신춘음악회로 출발을 알렸다. 1988년 11월 굿판 ‘4.3의 밤’이 펼쳐졌고 이듬해 4월 첫 4‧3추모제가 이곳에서 진행됐다.

다만 그 이후의 역사는 그림자 같은 얼룩이 곳곳에 묻어 있다.

1988년 8월 대극장과 전시실을 둔 제주도문예회관의 등장은 제주시민회관의 쓰임을 보다 서민적으로 바꿨다. 걸어온 20여년의 역사도 순탄했다고 보기 어렵다.

제주시민회관은 개관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시설 보완 지적을 받았다. 실내방음장치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개관 첫날부터 소음 민원이 발생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개관 초기 영화 상영 장소로 쓰였지만 영사기와 영사막이 없어 한동안 ‘개점휴업’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제주 메세나 운동의 씨앗 비슷한 것이 심어진다. 제주 출신이거나 제주에서 활동하는 기업인이 힘을 보태 시민회관의 명예(?)를 지켰다.

'애국가'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지휘자 안익태와 동행해 제주를 찾았던 재일교포 사업가 김봉학씨(2001년 작고·제주은행 초대 은행장)씨가 당시 돈으로 50만원 상당의 피아노와 20만원이 소요되는 무대막을 기증했다. 안익태 지휘자가 제주를 방문했을 때 지휘했던 탐라합창단을 제주시에서 육성할 것이 조건이었다.

제주석유 홍종언 사장 등이 의자 설치를 위해 1000만원이 넘는 공사비를 내놨다.

1964년 5월 재일교포 문화교류 사업 일환으로 제주를 찾은 제3차 재일교포모국방문단이 고향 방문을 기념해 마이크, 앰프, 스피커를 기증했다.     

이후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남았다. 누군가는 여기서 생활체육 경기를 했고, 누군가는 예비군 훈련을 받았으며, 누군가는 노인의 날 행사에서 빵과 우유를 나눠주는 도우미 역할을 했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첫 43추모제 모습

#내 기억, 아빠, 그리고


내 기억이 어땠는가 하면, 초등학생일 때 무슨 문학 백일장에서 입상해 상을 받으러 갔던 일이 있었고,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청소년단체 비슷한 모임에서 하는 행사에 참가했던 것도 같다.

그보다는 인근에서 나고 자라면서 ‘놀이터’처럼 즐겼던 기억이 더 강하다. 돌아가신 아빠의 사무실이 시민회관에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남다른 기억을 만든 이유가 됐다. 근처에 있던 시민다방은 서류 심부름을 핑계로 요구르트를 얻어 먹던 곳이었다. 아슬아슬한 계단과 아빠의 책상을 기억하는 건 삼남매 중 내가 유일하다. 왜였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연년생 여동생과 3살 터울 남동생이 있었고 중간 여동생의 사고까지 겹치면서 엄마가 나를 돌볼 여유가 별로 없었던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어디에 두든 조용히 배경이 됐던 아이였었다. 아빠를 아는 지인들이 아주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 하는 사무실 커피 제조법도 익혔다. 어디 쓸까 했던 그 경험은 좀 더 시간이 흘러 며느리감 1순위를 만들었다. 아니 만들었었다.

아빠 이직 후로는 그 근처에 갈 일이 없었는데 운명처럼 찾게 된 데는 내 취업이 있었다. 종종 열렸던 문화 행사를 취재하러 갈 때가 많았다. 특히 노인 행사를 할때는 시민회관이 1순위였다. ‘어르신들이 잘 알고’ ‘버스로 이동하기 편한’이 이유였던 기억이 있다.

#등록'문화재'는 아니라고  


건물이 낡았다는 이유 등으로 허물어질 위기에 몰렸던 제주시민회관은 지난 2016년 '제주시민회관 체육관'이란 이름으로 문화재 등록 추진대상에 오른 적이 있다. 문화재청이 전국적으로 건립된 지 50년 이상 경과한 근현대 체육시설 중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시설에 대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주시민회관도 그 대상 중 하나로 언급됐다.

당시 문화재 등록 추진대상 체육시설은 전국 7곳이었다. 문화재청은 근현대 문화유산의 체계적 보존관리 기반 마련을 위해 실시해온 근현대 문화유산 목록화 사업의 하나로 1876년 개항 이래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까지 건립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현존 체육시설 113건에 대한 목록화 작업을 했다. 다시 전문가 자문회의를 거쳐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문화재적 가치가 큰 7곳을 문화재 등록 대상으로 선정한 거였지만 지역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이 같은 내용을 반갑게 보도했던 언론과 달리 제주시민회관 인근의 일부 주민들은 '문화재'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정 문화재처럼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따를 거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결국 논란 끝에 등록 문화재 추진은 없던 일이 됐고 이후 활용을 둘러싼 오랜 논의 끝에 지난해 정부의 생활 SOC 복합화 사업 선정으로 일부만 남기고 사라지게 됐다.

시민회관의 역사성 보존 차원에서 건물 천장 일부 구조물(트러스)을 제외하고 철거한 후 지하 2층 지상 6층, 연면적 1만1275㎡ 규모로 신축해 문화·체육·건강생활지원센터 등 복합 문화시설로 활용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142면 규모의 주차 시설과 절반은 도서관을 배치했다. 4월 철거를 시작해 2023년 12월이면 새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달부터 시민회관 역사기록화 용역도 진행한다. 다만 아쉽다. 기억은 사라지면 그 뿐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애틋했던 감정도 식는다.

겨울나무를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가 자꾸만 제주시민회관에 오버랩 된다. 그렇지 않은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 꿈, 돌아올 날은 더 좋은 날이 될거라는 믿음은 우리가 아닌 제주시민회관의 몫이다. 그것을 어떻게 남길 수 있을까. 우리가 안아야 할 ‘빚’이다.      

    

화려한 공연이 끝나
박수갈채마저 사라져
추레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데     
힘없는 햇볕이 원망스럽게
강바람을 솔솔 몰고 와
앙상한 몰골에 닭살이 솟지만     
지난 시절의 화려함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꿈에
떨고 있는 겨울나무 슬프지 않다     
산목숨들은 다 그런 것 아닐까
돌아올 날은 더 좋은 날이 될 거라는
찰떡같은 믿음에서  

   ‘겨울나무 /박희홍’
1967년 당시 영화 상영을 하고 상가가 들어선 제주시민회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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