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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27. 2016

'제주해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

해녀 취재 15년차..물숨은 아직 어렵다

해녀취재를 한지 10년이 지나면서 숨비소리만 듣고도 동편 해녀와 서편 해녀를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미지 무단 전재와 사용을 금합니다.

1. 일단 빠지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2005년 봄이었다. 신문사 선배로부터 제주해녀를 주제로 한 기획 취재 얘기를 들었다. 솔깃했지만 망설여졌다. 그 때만 해도 나에게 ‘해녀’는 낯선 존재였다.    

제주에 산다고 다 ‘해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 ‘해녀’를 모르고는 제주를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됐지만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운이 좋아(?) 바닷가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경우가 아니라면 해녀를 TV에서 처음 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일 욕심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가 힘들 거란 부담도 고민을 키웠다. 구성된 취재팀을 보니 ‘성별’이 다른 것은 나 하나였다. 점점 빠져나갈 구멍이 좁아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한 번 해보자 싶었다. “해볼게요. 안되면 물질이라도 하죠 뭐” 치기 어린 한 마디로 시작된 일은 강산을 한 번은 바꾼다는 10년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 진행형이다. 마침표를 찍지 못할 거란 예감은 귀신같이 들어맞았다. 그동안 함께 팀을 이뤘던 기자 중 두 명이 신문사를 떠났고, 한 명도 내부적 사정으로 취재에서 빠졌다. 네 명이던 팀이 한 명으로 줄어든 것도 벌써 7~8년은 됐다.                     

# ‘어떻게 볼까’의 문제    

가끔 ‘제주 해녀’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제주해녀’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어떤 해녀를 알고 싶으신가요”    

벌써 몇 년째 선문답이다. 제주해녀의 역사만큼이나 할 얘기가 많다는 의미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하는 반응이다.    

‘제주해녀’만 말하라면 의외로 쉽다.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 나온 정의만 하면 술술 말하면 그만이다. 수산업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나잠어업’이고,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 여성들이 바다에서 해산물 등을 채취하는 형태를 지칭한다. 여기에 조금 더 토를 단다면 ‘세계적으로 희귀한 존재’라는 것,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개척정신의 상징이란 설명을 붙일 수 있다. ‘제주해녀’라 구분지는 것은 그러한 해녀가 제주에 가장 많이 있다, 제주에서 비롯돼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다는 의미를 보탰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령화 등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첨가되면서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대중에 회자된다. ‘교양예능’장르가 보편화된 이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함’과 남성과 대적해서도지지 않는 잠수능력 등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웰빙이니 장수니 청정이니 하는 관심과 결합해 요즘엔 해녀밥상도 소개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삶을 담백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사실 그뿐이라면 10년 넘게 그 흔적을 따라다닐 이유가 없다. 제주 100개 어촌계를 살피는 일이야 시간을 내 발품을 팔면 그만이다. 어느 어촌계에 해녀가 몇 명이고, 소라로 지난해 번 벌이는 얼마나 되고, 천초며 우뭇가사리는 어떻게 채취해 배분하는가 하는 얘기들은 행정용 자료로도 정리된다.        

# ‘커밍아웃’하다    

숱한 자리에서 제일 많이 했던 얘기가 있다. “제 할머니는 해녀였습니다. 멀리 황해도에서도 물질을 해 가솔을 거뒀습니다. 피난길 태어난 저의 어머니는 제주에서 자라며 물질은 할 줄 알지만 해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바다에 나간 것만 10년이 넘습니다. 해녀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녔어도 자맥질 할 꿈도 못 꿉니다” 지금 해녀의 현실이다. 천직처럼 ‘대물림’되던 것이 굳이 대물림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지금은 멀리서 지켜보는 상황이 됐다. 사회적 멸시나 천대를 받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런 불편한 잣대가 내 어머니가, 내 아내가 해녀라는 사실을 함구하게 했다.

취재를 진행하며 느낀 가장 큰 변화는 ‘해녀’에 대한 사회적 커밍아웃이다. 일반적 의미의 커밍아웃과 달리 해녀 커밍아웃은 해녀 본인보다 그 주변에서 적극적이다. 선거 운동 현장에서 “내 어머니는 해녀였다” “나는 해녀의 아들이다”하는 얘기가 나오고 해녀를 아내로 뒀다는 데 자부심을 표현하는 사람도 생겼다. 해녀 도전을 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을 품은 결단력 있는 행동이 됐다. 해녀들이 직접 자신들의 삶을 말하는 일도 늘었다. 처음 인터뷰 섭외도 어려워 발을 동동 굴렸던 일이 그만 ‘전설’이 됐다. 이 쯤 되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하는 대중가요 한 소절이 나올 만도 한데 현실은 생각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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