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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r 08. 2017

바다, 그리고 해녀와 닮아가다

해녀 취재 15년차..물숨은 아직 어렵다

벌써 7~8년 전이다. 현역해녀 중 최고령이라던 78세 할머니 해녀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차를 달렸다. 그해 겨울 들어 세 번째 물에 드는 날이라 어찌나 서둘렀던지 잠수회장에게 귀띔 받은 시간에 맞췄지만 해녀들은 이미 작업에 들어간 뒤였다.

한 번 작업이 시작되면 반나절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다음’을 생각할 겨를 없이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일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뭘 해야 하는지도 안다. 처음에는 차 안에서 밀린 자료를 뒤적거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시간이 안 간다. 그 다음 한 것은 주변 지형지물을 살피는 일이었다. 조금 익숙해지면 작업을 마친 해녀들이 돌아오는 길을 가늠할 수 있다. 그 것만으로 시간을 때울 수 없을 때는 해녀가 돼 본다. 물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어촌계 가입)을 구해야 한다. 해녀가 물질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날을 골라 해초를 말리기도 하고 잠수옷도 손본다. 탈의실도 정리한다. 잠수옷이나 테왁은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 청소를 해도 좋지만 바다에서 나온 것 중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도 해녀의 눈이 필요하다. 몇 년 해녀 취재에서 그나마 인정받은 것은 성게를 까고, 해초를 말리는 일 정도다. 말 그대로 단순 작업이다. 그래도 얼마나 능숙하게 손을 놀렸는지 지나가던 관광객이 말을 건다. 그만 어깨가 으쓱한다.

신문사 차원에서 ‘제주해녀’기획을 시작하면서 취재팀을 꾸려졌고 내 이름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솔직히‘대하기획’이란 말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제주에 살면서 해녀를 책으로만 봤던 터였다. ‘가능할까’ 보다는 ‘해도 될까’하는 마음이 컸다. 그나마 ‘겁이 적었던’까닭에 “해보겠다”대답을 했고, 그대로 11년의 시간을 해녀에 쏟아 부었다.

60은 어리다는 현역 해녀들 앞에 11년은 이제 바닷가에 나와도 좋다는 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운철 촬영. 무단복제나 전제를 금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라는 매뉴얼도 없었다. 주어진 것이라고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라는 목표뿐이었다.

처음 4명으로 팀이 꾸려졌을 때는 귀동냥이라도 좋았다. 적어도 2명 이상 현장에 나가거나 자료를 수집했다. 단발성 기사 외에는 해녀와 관련된 데이터가 없던 상황이라 관련된 내용은 뭐든 닥치는 대로 모았다. ‘해녀가 이런 것이구나’싶을 때 어촌계를 돌며 조사를 해야 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이쯤이야 했던 일은 꼬박 2년 반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생계가 달린 일에 귀찮게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묻는 사람들은 귀찮음 이상이었다.

78살 현역해녀를 만나는 일도 그랬다.

단순히 어촌계를 살피는 일이면 자치단체가 정리한 자료를 보면 충분했다. 취재반에는 암묵적으로 ‘사람 사는 일은 사람을 만나 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꼭 할머니 해녀를 만나야 했다.

그 지역에서 할머니는 전설에 가까웠다. 어찌나 물질을 잘 했던지 “물 아래 내려가(바다 속에서) 밥도 해 먹고 올 것”이란 말도 공공연했다.

할머니의 삶은 ‘제주해녀’의 축소판이었다. 이웃마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8살에 물질을 시작했다. 바다에 들어가 거름으로 쓰이는 듬북이라 부르는 해초를 거둬 말리 던 것이 조금씩 깊은 물로 이어졌고, 어느샌가 전복.소라 같은 것을 건져 올리는 수준이 됐다.

결혼하기 까지 경북 양포와 구룡포, 진도와 평일도, 소안도까지 가서 바깥물질을 했다. 결혼을 할 때도 ‘해녀’라서 환영을 받았다. 바다만 바뀌었을 뿐 물질은 계속됐다. 젖도 떼기 전인 딸과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들을 데리고 바깥물질을 갔던 얘기에는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봐줄 사람이 없어 해안가에 아기구덕을 놓고 작업을 하면 숨이 빨라진다. 아기 울음이 들릴까 온신경이 아기구덕에 쏠린다. 물 속에서도 환청처럼 울음소리가 들려 황급히 숨비소리를 뱉어냈다. 작업을 마치고 탈진하듯 물에서 나온 뒤에도 잔뜩 목이 쉰 채 축 늘어져 있는 아기의 안부를 확인하고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만삭인 상태에서 언 물에서 작업을 한 탓에 꼬박 만 하루 진통을 하고 아기를 낳았다. 그리고 단 며칠 만에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렇게 자식을 키운 해녀의 뒤에는 이제 손자가 있다. “배운 게 이 것뿐인데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계속해야지. 누구에게 손을 벌리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해녀는 바다를 배웠다고 했다.  ‘바다’라는 이름에는 이것저것 다 가리지 않고 다 ‘받아’준다는 의미가 있다. 어느 바다, 어느 해녀에게도 비슷한 사연들이 있다. 그렇게 줄잡아 100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해녀를 알게 됐다.

11년의 시간 동안 11살짜리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어머니’와 ‘가장’의 책임을 알게 되면서 해녀들을 보는 눈이 확장됐다.

출산휴가 전 마지막 취재가 해녀였고, 복귀 후 첫 취재가 해녀였다. 만삭의 몸으로 바다까지 가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100일의 출산 휴가에도 이동 시간만큼 차에서 쉬어야 할 만큼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고작 3일만에 찬 물에 몸을 던진다는 것은 “어우 대단하다”정도가 아니라‘어머니 그 이상’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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