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제주 생활 : 해녀문화대학 그리고 시골빵집에서 배운 것들
천금 같은 토요일 오후를 탈탈 털어 참여했던 해녀 강의가 마무리됐다. 11월 특강 일정이 있다는 귀띔을 듣긴 했지만 뭔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매번 조금씩 내용을 수정하며 공을 들렸던 터라 일정의 마지막 시간을 맡은 기분이, 묵직했다. 그래서 이전에 다 하지 못했던 얘기들까지 꺼내 녹진하게 풀어냈다.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풀어낸 얘기들이 ‘통할까’했던 걱정은 첫 시간에 덜어냈다. 반응을 살피며 수위 조절을 하고 힘 줄 부분과 뺄 부분을 고르고. 그래서 강의 준비부터 시작해 강의를 마치고 나면 힘이 쭉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오늘 덕분에 좋은 얘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진심 도움이 됐다…는 잔잔한 반응들이었다. 1~2년 전만해도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반응부터 과하게 긍정적이란 얘기를 들었었는데 지금은 조금 관점을 달리하면, 그리고 시절에 맞춰 이렇게 접근하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향유’에 대한 공감…도 힘이 됐다.
이름만 대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던, 소문난 상군해녀셨던 외할머니와 물질을 곧잘 했지만 소위 동네 대표로 제주시 유학을 감행한 엄마, 물에 들어가면 첨벙대는 게 고작이지만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는 나, 그리고 어쩌면 그 흐름 속에서 영감을 얻어 무언가를 할지도 모를 제연군까지, 해녀와 해녀문화를 향유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지키고 전승할 수 있다는 얘기에 공기 흐름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이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또,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를 챙기고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더 가벼웠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와타나베 부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2년 전 제주에서 진행됐던 강연 통역을 하면서 그들 부부의 삶과 방향을 많이 듣고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균을 따라 좀 더 작고 덜 개발된 지역으로 옮겨다녔던 부부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뒤 오카야마현 가쓰야마로 옮겨갔다가 이후 다시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인 돗토리현 지즈초로 이사했다. 발효 빵을 만들던 것이 숙성 수제 맥주까지 확장됐다. 균이 이끄는 대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 과정들이 책 등을 통해 알려졌지만 그것은 성공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주변 농가의 무화학비료무농약 농산물까지 최고의 조합을 만들고, 그에 합당한 가격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지금은 멈춘 상태다.
지난해 남편인 이타루씨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빵집을 접는 대신 ‘지즈 다루마리 연구소’를 열었다. 그동안 매일매일 새벽에 빵을 만들고, 그날 다 팔아야 하는 미션과 적극적인 마케팅을 거쳐 얼굴을 알지 못하는 다수의 고객에게 빵을 팔아야 하는 사업 대신 어떻게 하면 지역에서 더 잘 살 수 있는가를 연구 중이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리지만 그간의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된다. 지역을 거점으로, 그리고 균에 진심인 작업들은 밖에서 보기에는 멋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절대 쉽지 않다.
도쿄 명문대 출신의 청년들까지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다가 힘들다 등등의 이유로 떠나기 일쑤였다. 지원사업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싸는 일도 허다했다. 그들을 붙잡기 위해 마을 안에 영화관이며 이런저런 장치를 만들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지역에서만 가능한’의 실험 역시 주변의 관심이 커질수록 개발 바람을 부추겨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잦았다. 결국은 ‘이 것이 과연 맞는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빵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넘치는 생각들이 전해져야 할 곳에 제대로 전해진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빵을 구울 수 있었다고 생각을 다졌었다.
어쩌면 지금의 선택은 첫 마음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쓰는 방식이야말로 사회를 만든다. 자리가 잡히고 균이 자라면 먹거리는 발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상인과 장인이 크면 경제도 발효할 것이다. 사람과 균과 작물의 생명이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경제. 그것이 시골 빵집이 새롭게 구워낸 자본론이다.
빵을 굽는 우리는 시골 변방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의 태동을 오늘도 느끼는 중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_중
해녀 취재를, 필드 조사를 20년 넘게 하고 있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들을 단순히 경제활동을 하는 직업군으로 한정해서 봤다면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평가도, 전승해야 할 공동체 문화의 가치 같은 말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거다. 지금 조용히 지금껏 쌓아온 것들을 꺼내 잇고 조율하고 해석하는 것은 제대로‘자리’를 잡기 위함이다. 그랬던 경험들이 다시 로컬과 연결된다.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게 하는 것.
“개성이라는 것은 억지로 만든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진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원래 가진 인간성의 차이가 기술과 감성의 차이, 발상의 차이로 이어질 때 나타나는 것이며, 필연적인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_중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어디까지 해봤냐’는 질문을 받았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가 정한 방향에 맞춰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진심으로. 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