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 배추를 먹다
제주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김장이 한달쯤 늦다.
어렸을 때는 ‘가족이 함께’를 외치며 성탄 즈음에 김장을 했었다. 그 김장김치 맛이 어땠는지 보다는 빨갛게 얼어 얼얼했던 코끝과 한참을 씻어도 매웠던 손, 그렇게 먹으면 속이 아프다는 잔소리 같은 것이 남아있다.
길게 쭉 찢어 삶은 돼지고기에 둘둘 말아 건넸던 한 입을, 입짧았던 아이는 제대로 받아먹지 못했다. 생굴도 마찬가지. 그 좋은 걸, 그 귀한 걸 줘도 못 먹는다고 야단 맞고 눈물을 글썽였었다. 그럴 때가 있었다.
맛은 추억이다. 맛은 현재의 나를 돌연 다른 시점으로 공간 이동하게 만든다. 귀로 듣는 음악이 그렇고 코로 맡는 향기가 그렇듯! 혀 또한 지금 그 위에 오른 것만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 시공간의 다른 차원과 층위를 경험할 수 있게 디자인 되어 있다.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놓기만 하면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신기하고 황홀한 일이다.
#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_중
콧날이 시큰. 배추 얘길 하다가 책 하나를 들춘다. 2019년 나온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다. 작가가 2018년 10월 세상을 떠난 전 썼던 음식과 관련해 썼던 글을 끄러모은, 일종의 유고집이다. 그 사연을 알고 읽었던 터라 조각글이란 느낌보다 좋은 재료, 오래 묵은 손맛, 대를 이은 레서피, 사람 특히 여성의 가슴 높이 세상이 울컥울컥 몽글몽글 모였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배추는 책 앞부분에 나온다
겨울 배추는 달다.
달 뿐 아니라 살짝 고소하고 은은하게 매콤하기도 하다. 배추 뿌리의 야물고 칼칼한 감미는 나중 먹어본 강화 순무와 흡사한데 가을 지나고 서리 내린 후쯤이면 뿌리의 달고 매콤한 기운이 이파리 위쪽까지 쑥 치밀고 올라온다. 이 맛은 여운이 오래간다.
배춧잎을 씹어 삼키고 난 후에도 알싸하게 혀끝을 감돈다. 그래서 배춧잎을 된장에 찍어 먹는 손을 좀처럼 멈출 수가 없게 만든다.
#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_중
뒤로 “어매요, 배추적을 한 두레 구울까요?”하고 나이 들어 이가 상한 어른들과 돌솥뚜껑에 들기름을 두르고 풀풀 묽게 갠 밀가루 반죽을 곁들여 구워낸 배추적 얘기가 이어진다.
생속의 반대말은 썩은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산다는 건 결국 속이 썩는 것이고 얼마간 세상을 살고 난 후엔 절로 속이 썩어 내성이 생기면서 의젓해지는 법이라고 배추적을 먹는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다.
#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_중
배추 얘기만 골라 해서 그렇지 책을 읽다가 유난히 첫 외손주를 아껴주셨던 외할머니 생각에 훌쩍이기도 하고, 한 구절도 흘려보내기 아까워 마킹테이프를 고슴도치 가시처럼 세워놓기도 했다.
돌아와 배추 얘기다. 이번 겨울 배추가 그렇게 입에 맞는다. 고기 먹으러 가서 쌈배추로 배가 불렀다는 전설(?)을 쓸 만큼.
마침 김정철이라 여기저기 배추가 흐드러졌다. 장을 보는데 귓가로 “이번(김장)은 몇 포기나 하냐” “젓갈은 뭘 쓸거냐” “우리는 황태 머리를 넣은데 **“ 같은 김장 서사가 한가득이다. 접이식 수레에 배추 무더기가 옮겨지고 방앗간에서는 쌀가루 대신 고춧가루를 빻느라 정신이 없다.
그 사이에서 또 배추 하나를 골라들었다. ‘알싸한 여운을 품은, 달 뿐 아니라 살짝 고소하고 은은하게 매콤한’ 그 것을 새해들어 거의 매일 먹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려 ‘말없이 반짝이고 글썽이는 것들’에 흔들렸다. 이번은 ‘배추‘가 그 자리에 앉았다. 원숙하고 의젓한 시간의 힘인 늙은 호박, 배릿한 냉잇국맛, 입안의 아픈 부분을 순하게 따스하게 다정하게 어쩌면 슬쩍 서러운 듯도 하게,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좌르륵 도포하는 흰죽. 어떻게 이런..하면서 비슷한 어떤 것을 꺼내지 못한 아쉬움에 배추를 푹 익혀 먹으면서 “잘 하지 않아도 돼, 1등이 무조건은 아니”라는 얘기 앞에서 눈만 꿈쩍거린다.
정성, 거기에 대해 나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아졌다.
젊어서는 겨울 배추, 그 슴슴하고 달큰한 위로 주변에 널려 있는 하염없는 정성들을 비웃었다. 나는 남들에게 저렇듯 헛된 정성을 바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나이든 지금은 우습게도 정반대가 되었다. 인간이 제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 가치는 정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_중
배추 덕에 어떤 정성이 좀 부족한 걸 알았다. 여기까지 인가 하면서도 그다지 서운하지도 않다. 대신 배추를 푹 익혀 속을 달랜다. 밀린 스트레스가 쌓여 부대낀 속을 슴슴하게 어루만져 준다.
이 기운을 언제까지 누릴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계절이 바뀔 즈음까지 서걱서걱 배추를 씹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올해 김장은 아빠 기일 후 1월 초중순으로 늦춰졌다.
배추 맛을 익힐 꼭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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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