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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an 14. 2022

‘알려지지 않은’과 ‘알려고 하지 않은’

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 신물질로드-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 2

많은 이들이 수많은 작업을 했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내가 한 일’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깊은 이해와 조사 없이 쏟아내기만 하는 것은 역사 앞에, 그들 앞에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이제야 알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부터 챙겨야 한다.     


 

1983년 서울 국립극장 실험무대에 올려진 수눌음의 '좀녀풀이'                                                        사진=수눌음 소장

△1983년 2월 서울을 울리다


1983년 2월 하순 서울 국립극장 실험무대는 날카로운 시대정신으로 흔들렸다. 제주 마당굿의 시작점인 수눌음의 '좀녀풀이'다. 몇 번이고 '제주어 번역본'(?)을 넘겨 가며 극에 몰입한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것은 치열했던 '기억의 투쟁'이었다.

제주 극단의 첫 서울 공연이라는 의미에 더해 더 강렬했던 내용을 기억했다. 당시 기준으로 반세기도 더 전에 제주 땅에서 벌어졌던 실화라는 점은 말도 통하지 않고 어찌 보면 낯설기까지 한 공연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좀녀풀이는 제주해녀항일운동을 극화한 작품이다. 이쯤 되면 수눌음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수눌음의 일원이었던 김수열 시인(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지회장)과 김수범 화가(전 탐라미술인협회 회장)에게 기억을 나눠 달라 부탁했다. 당시 ‘활동’했던 이들이다.   

  

1983년 서울 '좀녀풀이'공연에 참여한 김수열 시인(사진 가운데)                                                      사진=수눌음 소장

△젊은, 시대를 훑은 열정


서울 무대에서 공연까지 했으니 일단 ‘극단’은 맞다. 1980년 8월 당시 제남신문사 2층에서 창단을 겸해 ‘땅풀이’공연을 했다. 실제 ‘일반 단체 극단’으로 등록까지 했다.

시작점은 5·18 당시 광주에서 제주로 몸을 피했던 황석영 소설가가 있었다. 제주에서 만난 ‘문화쟁이’들과 의기투합했다. 뜻이 모였으니 다음은 제대로 움직일 동력이 필요했다. 제주대학교에 ‘탐라민속문화연구회 수눌음’ 동아리를 꾸렸다. 이후 하나의 수눌움으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극단’의 기억과 ‘탐민’의 추억이 엉킨다.



극단이기도 했고 문화 연구도 했다. 사실상 제주 문화운동의 시작점이었다. 지역을 연구하고, 시대를 고민하고, 무대 위에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두 번째 공연은 현 제주우체국 맞은 편에 있던 동인 건물 지하 수눌음 소극장에서 올려졌다. 1980년 10월 말 공연한 ‘항파두리 놀이’는 삼별초 항쟁을 제주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해 풀어낸 작품이었다. 세 번째 역시 역사극이었다. 1981년 ‘돌풀이’는 1862년 강제검의 임술민란을 소재로 했다. 이재수의 신축민란(1901년)보다 40년은 앞서 제주 섬에서 벌어졌던 농민들의 봉기를 그렸다.

시대 흐름을 봤을 때 그 다음으로 해녀항일운동을 낙점한 것이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1981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기영 소설가가 동아연보 살피다 ‘1932년 제주 세화리에서 해녀들이 들고 일어났었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귀띔한 것이 불씨가 됐다. 수눌음 회원들은 세화리로 여름방학 봉사활동을 떠난다. 낮에는 동네 어른들을 돕고 저녁에는 해녀 삼촌들의 옛 기억을 채록하고 민요를 배웠다. 그렇게 ‘좀녀풀이’가 탄생했다. 서울 공연은 좀녀풀이 공연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 2개로 성사됐다.

대한민국 문화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녹음본을 듣고 ‘이걸 제주에서만 공연한 채 둘 수 없다’며 등을 떠밀고 판을 깔았다.  


△제주 민중항쟁의 피(血)…현기영·강요배 

군부독재 체제에서 뭐 하나 자유롭지 않던 때였다. 젊은 피들이 모인 것 만으로도 불편한 시선을 받았을 시절에 시대를 읽고 세상에 알리는 문화 운동을 펼쳤다.

드러내 할 수는 없었다. 좀녀풀이에는 ‘혁우’라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해녀항일운동의 배후에 있었던 혁우동맹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연극 대본에도 검열이란 것이 있던 상황을 은유와 비유로 잘 풀어냈지만 이후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공동 창작 시스템으로 감시의 눈을 피했지만 1983년 화순 자유 무역항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대하는 내용의 공연 ‘태손땅’을 준비하다 강제 해산이란 아픔을 겪었다. 사전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대본을 무대에 올린 것이 이유가 됐다. 1987년 다시 문화예술극단을 만들고자 뜻을 모았지만(한올래, 눌)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몇 번 무산된지 옛 기억으로 남기게 됐다.


그랬다고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순이 삼촌」으로 제주4‧3을 세상에 알렸던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는 1988년 한겨레에 10개월 동안 제주해녀항일운동을 그린 소설 ‘바람타는 섬’을 연재한다. 현기영 작가는 제주해녀의 항쟁 정신이 제주4‧3에까지 계승됐다고 보고 1930년대 해녀들의 치열했던 삶을 연구했다. 그 기억을 역시 제주 출신 강요배 화백이 삽화로 살려냈다. 이듬해 나온 장편소설 ‘바람타는 섬’(1989)에는 풍선에 의지해 바다를 건넜던 해녀들의 의지가 새겨져 있다. 또 섬 밖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아나키스트의 입을 빌려, ‘알몸으로 자연과 밀착하며 살아가는 해녀들은 바다밭의 공동 소유, 공동 관리를 통해 평등사회를 만들고 권력의 억압을 받지 않은 개인들의 상호 부조로 공동체를 꾸려간다’고 적었다.  

바람타는 섬 삽화                                                                                소장= 강요배 화백


△‘이제야 알았다’는 반성


해녀항일운동 얘기를 꺼낼 때마다 따라붙는 ‘알려지지 않은’에 대한 반성이 여기서도 고개를 든다. ‘알려지지 않은’과 ‘알려고 하지 않은’은 분명 차이가 있다.

역사라는 것이 기득권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기억되는 탓에, 여성(해녀)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가시가 달린 것에 마음을 주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랬다고 손 놓고 모른 척하지 않았다.

이미 1980년대에 공연을 통해 사실을 알리려는 노력이 있었고, 신문 연재 소설로 10개월 넘게 사람들의 눈과 입에 오르내렸다.

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힘써 독립유공자 명단에 10명이 넘는 이름을 올렸다. 많은 이들이 수많은 작업을 했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내가 한 일’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깊은 이해와 조사 없이 쏟아내기만 하는 것은 역사 앞에, 그들 앞에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이제야 알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부터 챙겨야 한다.  

해녀항일운동 87년 기념식 중 퍼포먼스.
제주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바람 타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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