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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an 12. 2022

가만히 앉아 역사가 되길 기다리는가

한바당해녀 이어도 사나 신물질로드 - 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 1


“당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다 인정을 받지는 못해서 그게 마음이 쓰여. 해녀로서 독립을 바라며 일제와 싸운 것은 똑같은데 왜 거기에 차등을 두나?… 우리가 한 일은 자랑스럽지만 세상이 너무 박하고 빨리 잊는 것 같아서.”( 책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2021년·한겨레출판> 여성 독립운동가 김옥련 편 중)          
부춘화.김옥련.부덕량 해녀. 국가보훈처 제공.

△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부춘화(1908~1995)·김옥련(1907~2005)·부덕량(1911~1939) 해녀가 2022년 첫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다. 제주 출신, 그리고 건국포장 추서를 받은 독립유공자가 선정된 것은 관련 사업을 시작한 1992년 이후 처음이다.

그 의미는 각별하다.

올해는 일제강점기 제주해녀들이 살기 위해 뭉쳤던 1932년 그날로부터 90년이 되는 해다. 그들의 외침을 의미 있게 꺼낸 배경에는 안타깝게도 ‘정주년’효과가 있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9년의 1월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였다. 제주 출신의 1월 독립운동가로 부춘화 해녀가 선정됐다.

유관순 열사는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선정됐던 314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재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 중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전에는 1999년 3월의 독립운동가였다.

이번 역시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지금껏 없었던 건국훈장 아래의 훈격인 건국포장을 받은 해녀항일운동의 여성 주역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해녀항일운동기념탑

△아직도 멀고 먼 길     

아직 하지 못한 일, 그래서 해야 할 일, 그리고 기억해야 할 일에 대한 다짐이라 애써 의미를 부여해 본다. 하지만 더디고 약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지난 2018년 제73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재인대통령은 "발굴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다"며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 사례로 제주해녀 항일운동과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항일운동을 꼽았다.

그리고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제주해녀항일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독립유공자 추서 작업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후 발굴·조명 작업이 이뤄졌지만 현실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주출신 독립유공자 196명 중 여성은 고수선(1898~1989), 최정숙(1902~1977), 부춘화(1908~1995), 김옥련(1907~2005) 부덕량(1910~1939), 강평국(1900~1933), 현호옥(1913~1986) 선생 등 7명이 전부다.

‘제주 여성 첫’이란 수식어, 제주해녀, 교육 선각자, 노동운동가 등 지역, 여성이라는 이유가 그들의 노력과 역할을 희석할 수는 없어 보인다.

역사는 어쨌든 반복되고, 누군가 기억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별할 수밖에 없다.  

   

87주년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식 모습
90주년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식 모습. 제주해녀박물관 제공.

△제대로 보고 있는가

제주해녀항일운동를 다시, 제대로 살펴야 할 이유는 더 있다.

광복 50주년이던 지난 1995년 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제주 최대 규모 항일운동에 대한 평가치고는 박하다. 여성이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심하다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해녀 항일운동의 배후 주도세력이었던 사회주의 계열 '혁우동맹’ 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은 결과다.

일제강점기 판결문, 범죄인명부, 수형기록을 포함한 자료를 전수 조사해 독립운동가를 한 명이라도 더 찾아낸다는 정부 방침이 정해진지도 수년이 지났지만 제주해녀항일운동의 경우 관련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단념하기는 이르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6월~1932년 1월 구좌·성산·우도 지역 해녀 1만7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 238회에 걸쳐 진행된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다.

해녀들이 어느날 갑자기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한 이유가 있고,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곳곳에 남아 있다. 눈 앞에 벌어진 일 만이 아니라 배경과 흐름을 모두 살펴야 한다는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해녀항일운동은 1930년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해조류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녀들도 함께 저항하면서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1930년 '성산포 사건'으로 촉발됐다고 보고 있다. 당시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이 해녀들이 수집한 우뭇가사리를 부정판매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다시 비슷한 일이 구좌 지역에서 발생하면서 지역 해녀와 청년들이 더이상 억울함을 참을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서게 된다.

 1931년 12월 부춘화(1908~1995)·김옥련(1907~2005)·부덕량(1911~1939) 해녀가 하도리 해녀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이들은 해녀들을 모으며 시위에 앞장섰고, '제주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요구조건을 이루기 위해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했다.

이후 일제의 무장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미결수로 수 개월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이 일은 제주에서 독립에 대한 뜻을 모으던 ‘청년’들을 색출하는 카드로 됐고, 치밀한 색출 작업 끝에 제주에서 벌어진 ‘어떤 일’로 조용히 정리된다.

해녀항일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

모든 글은 직접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쓰고 있습니다 [무단 복제 및 도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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