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신물질로드
얼굴책이 몇 년전 오늘을 소환했다. 2018년 12월 어느날의 일이다. 그날의 일을 이렇게 적어뒀다.
“정말 고맙습니다”...오늘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올해로 89세가 되셨다는 성산 출신 할머니, 김녕이 고향이라는 76세 할머니를 극적으로 만났다. 국적 불문 ‘아줌마’의 힘...이 만든 결과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시간을 거슬러 그 날로.
통국사에 세워진 4.3위령비를 직접 보고 섬, 마을을 상징하는 돌 하나하나 더듬고 돌아온 길. 오사카 츠루하시 시장 야채가게 사장님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전에 얘기했던 할머니를 찾았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해녀를 찾아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걱정부터 하셨던 일본인 사장님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시장 구석에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사장님은 ‘아주 나이가 든 어르신들이 아니면 모를까…’ 하시다가 몇 해 전인가 직접 채취해 손질했다는 미역을 나눠주던 한국 할머니를 기억해 냈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몰랐지만 가끔 시장 근처 찻집에서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라 잘 하면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에 무작정 부탁이란 걸 했다. 출장길이었지만 어느 순간 두 손엔 야채가게에서 산 귤과 이런 저런 것들이 묵직했다. “혹시 모르니…”하며 치른 비용치곤는 저렴했다.
며칠 전부터 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다는 고령의 할머니 얘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할머니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할머니댁 주소를 손에 넣었다. 한때 제주 타운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사라진 '이카이노' 근처다. 낯선 오사카 작은 동네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찾아야만 했다. 몇 번이고 작은 길을 오르내리며 주소를 읽기 시작했다.
“すみません”.....낯선 이의 방문이었지만 ‘제주’라는 말에 집을 내어주신다.
“무슨 말로 하는 것이 편할까”....하신 할머니는 일본어와 제주 사투리를 섞어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풀어내셨다...알고 싶었던 조각이 툭툭툭. 그래서 절로 “고맙습니다”하는 말이 나왔다.
만남 당시 76세였던 임순애 할머니는 1964년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태어난 곳은 김녕이다. 18살에 집안 빚을 갚기 위해 먼저 일본에 간 어머니를 따라 바다를 건넜다. 돈을 벌겠다고 나섰지만 ‘불법 체류’신분에 일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려웠다.
속을 태우던 차에 일본에 건너와 물질을 하던 사촌고모(임송주)에게 일을 배웠다. 고치현, 우와지마 등에서 작업을 했다. 당시 제일 나이가 어려 주변에서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았지만 일을 그만 둔 뒤에는 같이 작업하던 해녀들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른 일에 비해 현금을 일찍 손에 쥘 수 있었던 그 때, 임 할머니의 인생에서 24살까지 6년의 시간만큼 힘든 시기는 없었다.
임 할머니에게 물질을 가르쳐 준 사촌고모는 이후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물질을 했다. 먼저 일본에 건너간 남편이 현지에서 재가를 하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임 할머니는 결혼을 하면서 일을 그만뒀다. 돈을 벌기 위해 머구리 작업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탓에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물질까지는 아니어도 몇년 전 바다에 가기도 했다. 지금은 허리에 보호대를 대고 간신히 걸음을 뗀다.
“그때는 얼른 돈 벌어서 집에 살 생각만 했지…이렇게 여기서 늙을줄 몰랐지”
“힘든 걸 왜 기억하라고… 아이고 사람사는 게 다 똑같지. 어린데 고생한다고 언니들이 데리고 놀러도 가 주고, 벌이가 되는 걸 찾아 주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못 버텨..힘들어서”
흑백사진 속의 임 할머니는 해맑은 미소를 지닌 20대다. 꽃 같다. 지금은 '니시하라 준아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힘들게 몸을 일으킨다. 20대 사진 속 모습은 없지만 미소는 더 깊어졌고 여전히 곱다. 내 눈에는 지금도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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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모습' 중 1960년대 물질 준비하는 해녀들.(고 김홍인 선생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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